이번에는 보문지역, 천군지역 낭산주변 문화재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고운선생 독서당- 낭산에 있는 서당지에서는 경주시가 조망되고 있으며 현존건물은 4칸 겹집에 팔작 지붕을
취하였으나 근세에 보수가 있었고 나아가 초석 역시 혼란이 있어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기란 어렵게 되었다
다만 산세를 의지하여 볼때 서향의 수칸 건물이 아닐까 짐작된다 즉 초석등의 몇몇 석조물을 제외하면 고식의
유구는 전혀 확인 되지 않는다
고운선생 독서당비- 고운 최치원 선생을 기리기 위한 비
구황동 당간지주-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 바로 남쪽에 있는데 통일 신라시대의 것으로 높이는 360센치미터이다
양기둥 사이에는 동쪽으로 향한 돌거북이가 있는데 당간의 받침돌로 돌 거북이를 배치한것은
다른 당간 지주에서는 흔히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구황동 모전석탑지- 이 탑은 중국 벽돌탑을 본 떠 쌓은 분황사 탑과 같은것이 었는데 지금은다 허물어지고
남, 북 감실의 돌기둥 2쌍만이 남아 있다 돌 기둥이 배치된 모양으로 미루어 볼때 원래의 탑은 1변길이 4.5미터
쯤되는 크기로 첫 옥신을 쌓고 그 사면에 감실을 만들어 사망불을 모셔 놓은 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황동 고인돌의 일종인 지석묘
구황동 폐탑지 - 황룡사 발굴터에 폐탑이 동탑과 서탑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
구황동 삼층석탑- 이 석탑은 높이 7.3미터인데 이중 기단위에 3층으로 쌓아올린 통일신라 시대 전형 석탑의 모습
을 잘 나타내고 있다 1943년 이 탑을 수리 할때 순금으로 만든 여래좌상, 여래입상과 금동사리함이 나왔다 여래좌상
의 높이는 12.2센치미터로 국보 제79호이며 여래 입상으 로 높이 14센치미터로 국보 제80호이다
금당지 - 사찰의 중심건물이며 본존불을 모시는 곳이 금당인데 삼국유사에는 황룡사금당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금당의 기단은 성토중을 되파기 한후 다짐하였다 규모는 동서 51.7미터, 남북26.7미터이며
총면적은 1,384제곱미터이다
남고루- 남고루는 대능원 입구에서 북동쪽으로 황오동 고분군을 감싸면서 북천까지 이르렀으나 지금은 황오동 일대
에서만 남북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담장 같은 이 터는 언제 무엇을 하려고 만든것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낭산- 경주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 고치처럼 누워 양족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었다 산허리는 잘룩하며 높이는
108미터로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옛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불리며 신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낭산 마애삼존불- 이 마애삼존불은 낭산 서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런예는 매우 드문일이다 중앙에 있는 본존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고려 불화에서 보이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비슷하다
능지탑지- 이 탑지는 낭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것으로 보이는 건조물로 높이는 4.49미터이다
능지탑, 능사탑 또는 연화탑이라고도 부른다 무너진것을 다시 쌓을때 원형을 알 수 없어 2단만 쌓고 나머지 돌은
옆에 모아 두었다
동방와요지군터- 이 가마터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조사한 9기의 기와 가마터이다 그중 1기를 벌굴한결과 가마의 전체
길이는 10.5미터, 너비는 1.72미터로서 구릉 경사면을 이용하여 구축된 굴가마(등요)로 밝혀졌다
배반동 고분군 터
보문동 고분군 터
보문리 당간지주- 이곳은 보문사터의 중심인 금당터, 동, 서탑터 등으로 부터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곳이다 이 당간
지주의 안쪽면은 평면이며 나머지 세면의 아랫쪽은 잘록하고 그위는 점차 가늘어진다 상,중,하 세곳에 당간을 고정
시키던 구멍이 남아 있다 남쪽 기둥은 구멍이 완전히 둟렸고 북쪽 기둥은 반쯤 둟려 있어 특이하다
보문리 사지- 이 절의 처음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보문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절 이름이 보문사 였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석제 유물이나 건물의 베치로 보아 통일 신라시대에 건립된 절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금당지
동서 목탑지 등의 건물터와 석조, 당간지주, 초석, 석등부재 등이 남아 있지만 걸터의 대부분 넓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보문리 석조- 이 곳은 신라시대부터 중요하게 여겨온 낭산과명활산성 사이에 형성된 들판으로 보문사라고 새겨진
기와의 발견을 통해 절 이름이 알려졌다 이 돌 물통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절에서 물을 담아 사용하였던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문사지연화무 당간지주 - 이 기둥은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로 높이는 146센치미터이다 기둥의 아랫부분이 상당히
매몰되어 있어 간대나 기단부의 구조를 확인할 수 없다 현재까지 원 위치를 지키고 있는것을 생각되며 동서로 62센치
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개의 기둥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특히 이 당간지주의 윗부분 바깥 측면에 설정된 방형
구획안에는 지름 47센치미터의 팔엽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분황사-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석탑가운데 가장 오래된것으로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난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음어
쌓아올린 모전석탑이다 기단의 규모나 탑의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이 있을것으로 추정된다
분황사석정- 이곳은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우물들의 외부는 높이 70센치미터의 8각이고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의 진리를,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제를 뜻한다
분황사약사여래입상-경북분화재자료 제319호인 분호아사약사 여래입상은 보광전에 모셔져 있으며 왼손에 들고 있는
건칠제 약그릇의 뚜껑안쪽에 '건륭삼십구년을미사월이십오일조성야'라는 붉은 글씨가 남아 있어 조선영조 50년(1774)
에 제작된것을 알 수 있으므로 제작연대가 확실하여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분황사화쟁국사비부-이 비부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원효대사비의 받침돌이다 비석은 고려 숙종 6년(1101)8원에 내린
조서에 의하여 분황사에 건립되었다
사천왕사지-낭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천왕사는 신라 문무왕 19년(679)에 명랑업사가 발원하여 세운절이다
삼을 통일한 신라가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고자 하는 호국염원이 깃든 사찰로 사천왕사 성전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지금은 금당터, 목탑터, 건물터와 당간지주 머리부분이 없어진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 2기등이
남아 있다
사천왕사지 당간지주
선덕여왕릉- 이능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632-647 김덕만)이 모셔진곳이다 경주시 동남쪽에 있는 낭산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설총묘- 이 묘는 신라 중대 문장가의 한사람인 설총의 무덤이라고 전해온다 설총의 아버지는 원효대사이며
어머니는 요석공주이다
성동전랑지-통일신라시대의 건물이 있던자리로 1937년 북천제방공사중 발견되어 발굴조사가 실시 되었다
당시 조사된 면적은 약 2,000평으로 건물터 6곳, 긴복도터6곳, 문터로 보이는 2곳, 담장으로 보이는 3곳, 우물터1곳,
배수구 시설 2곳 등이 조사 되었다
신무왕릉- 신라 제45대 신무왕(재위839 김우징)이 모셔진 곳이다
신문왕릉-신라 제31대 신문왕(재위681-692 김정명)이 모셔진 곳이다
진평왕릉-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 김백정)이 모셔진 곳이다
천군동삼층석탑-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으로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절 이름은 알 수 없고 이중 기단위에
세위진 일반형에 속하는 두 탑은 양식이나 규모가 같다 높이 7.7미터인 서탑은 탑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일부 남아
있고 꼭대기 머리 장식이 없어진 동탑의 높이는 6.7미터이다
천군동폐탑지-일명 피막골이라고 부르는 곳에 초층옥신과 기타 부재가 흩어진 상태로 있다 옥개석에는 사면에
각각 1구씩 입상으로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신석 윗면에은 방형의 사리공이 아닌 원형 사리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