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문주왕 원년(475) 한성 위례성으로부터 이곳으로 도읍을 옮겨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옮길때까지 5대 64년간 왕도를 지킨 산성이다 북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미터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혜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미터, 남북으로 약400미터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산성은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이며 원래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선조, 인조대에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성곽의 총 길이는 2,660미터로 토성을 제외하면 2,193미터가 된다 현재의 성벽은 높이 약2.5미터 너비 약3.0미터로
대부분이 보수되었고 성내 유적은 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쌍수정, 명국삼장비, 쌍수산성사적비,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임류각, 광복루등이 남아 있는 1500년 시공을 초월한 백제의 고성 공산성과 무렬왕릉을 방문 자연이 주는
싱그러움이 가슴속 깊이 스며 들었다
제민천교영세비는 1817년(순조17) 제민천이 대홍수로 범람하고 제민천교가 붕괴되자 이를 재건립한 사실을 기리는
비석이다
공산성 입구 매표소 들어가기전에 꾸며놓은 조형물
서쪽에 설치한 금서루 성문에서
공산성에서 금서루와 공산정을 바라보면서
너비 3.0미터인 공산성의 모양으로 우측에 우거진 숲과 낭떠러지
산책길로 어울리는 공산성 성곽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웅진시대 초기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왕궁지
문화재자료 제49호인 쌍수정은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일시 파천한곳이다
도지정유형문화재 제35호인 쌍수정 사적비는 인조가 환도시 이 쌍수에 정 3품 대부작을 하사 하였는데 그 후 나무는 죽고
구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이 유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관찰사 이수항이 영조 10년에 건립한것으로 전함
공산성안에 있는 효도의 길
공산성의 성곽
도지정유형문화재 제36호인 명국삼장비로 정유재란시에 공주에 주둔하면서 공주민을 안호하였던 명나라의 3장수 즉 제독 이공
위관 임제 유격장 임방위의 업적을 기린 송덕비이다
임류각은 백제 동성왕 22년(500년) 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건물로서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다
문화재자료 제50호인 광복루는 공산성의 동쪽 가장높은 지역에 위치하며 이곳은 공산성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토성중 겹성이
위치한곳이다원래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누각을 현위치에 옮기고 8.15해방을 기리는 뜻으로 광복루라 개칭
금서루는 4개의 성문중 서쪽에 설치한 문루였으나 유지만이 잔존하면서 성내로 진입하는 차도로 이용되다가 1993년에 복원되었다
공산성이 처음에는 토성으로 쌓았던곳을 말하여주는 남아 있는 토성성곽
공산성의 성곽
공산성의 관광객을 위한 공예 체험장
활쏘기 체험장
방패용으로 만들어 전시해놓은것처럼 보임
공산정은 서북쪽 산마루에 있는 누각이다 이곳에서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금강교 등 공주의 전경을 한눈에 전망 할 수 있다
공산정에서 바라본 금서루와 성곽
금서루로서 공산지에 의하면 문루의 규모는 동문과 같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 건물이었다고 한다
성곽의 경비를 맡는 수문병들
송산리 고분군은 무령왕릉의 모형의 실물크기로 제작하여 관람객들에 직접 내부에 들어가 관람 할 수 있도록한 전시관 입구
무령왕릉 축조 과정을 보여주는 무습
용의 모습을 한 조형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
송산리 제1-4호분의 4기의 벡제 굿식돌방무덤으로 이미 도굴된 상태에서 공주지역 백제 유적 가운데 1927년에 처음으로 조사가 이루
어졌다
무령왕(461-523)은 이름이 사마 혹은 융 시호는 무령이다 동성왕이 시해된 501년 40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523년 62세까지 23년간의
재위기간동안 민생안정과 백제의 국력을 신장히여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는등 대,내외적으로 큰업적을 이룩하였다-무령왕릉 모습
공산성에서 바라본 공주시내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