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338-1번지에 위치한 유관순 열사 생가는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만세 운동당시 일본 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점없이 모두 전소되어 빈터만 남아 있는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하였다 생가옆에는 기념비가 서 있고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유관순열사 생가
유관순열사 생가 비문 -
천년에나 한번씩 나타나는 크고 빛난 별이 바로 이곳에 내려와 천구백이년 양력 십이월 십육일에
유관순으로 태어났다. 유관순은 별처럼 밝고 총명하고 씩씩한 처녀로서 아버지 유중권씨와
어머니 이소제씨의 교훈 아래 어려서부터 효성과 신념이 강하였고 형제와 친구에게도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다.
관순은 1915년에 서울 이화학당에서 배우는 동안에도 성실한 모범생으로 이름이 높았다.
열일곱되는 기미년 거국적인 삼일독립운동에 참가 했으나 무자비한 자들의 탄압으로 숙원을 이루지 못한채
고향에서 다시 거사할 것을 결심하고 지령리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마을의 원로들과 청년들을 동원하여 본부를 지령리에 두고 사방 백리 안팎 각 고을 사십여 마을을 포섭하는
책임을 혼자 맡고 나섰다. 때로는 여우와 범도 만나고 대낮에 장정도 꺼린다는 높은 재를 밤중에 몇 개나 넘어
발이 짓물러서 촌보가 어려울 때도 있었으나 오직 찬송가와 기도로써 힘과 용기를 얻었다. 이같이 이십 여일을
돌아다니며 교회, 학교, 유림의 대표들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거사의 장소와 시일을 약속한 다음
마침내 음력 이월 그믐날 밤에 관순은 매봉에 올라 내일을 알리는 봉화를 높이 들었다.
천안,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 사방 여섯 고을의 원근 산봉우리에는 스물 네개의 봉화가 약속에 호응하여
두 시간이나 조용하게 타올랐던 것이다. 음력 삼월 일일 정오에 아우내 장터에서는 나라의 주권을 외치는
수만명의 만세소리가 태극기의 물결과 함께 천지를 흔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관순의 부모와 이십 여명의 열사들은
즉석에서 저들의 총칼 아래 충혼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어 관순도 체포되어 일본헌병의 손아귀에서
갖은 악형을 당했으나 추호도 굴하지 아니했으며 마침내 삼년의 형을 언도받았다. 그리하여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도 밤낮없이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가 천구백이십년 구월 이십팔일 여덟시 이십분에 크고 빛난 우리의 별은
열여덟해 머물렀던 이 땅 위에서 빛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그 별은 오늘도 이 하늘에 떠있어서 영원한 겨레의 별이 된 것이다
(이 곳은 사적 제 이백삼십호로 지정되었고 천구백육십삼년 구월에 비를 세웠는데
천구백칠십육년 시월 이십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 뜻깊은 유적을 정화하고 정성으로 보호하라는
뜻을 받들어 천구백칠십칠년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 비를 다시 세우고 봉화탑을 새로 쌓고 추모각과
매봉교회를 보수하여 성스럽게 수호하게 되었다)
서기 일천구백칠십칠년 팔월 일일 세우다.
박화성 짓고 이철경 쓰다
유관순 열사 생가에서
유관순 열사가 다니던 매봉교회
만세소리 삼창
유관순열사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1919년 4월 1일의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3월 31일 밤에 봉화를 올렸던 봉화탑
봉화탑 앞에서
봉화탑에서 내려다본 마을 전경
유석 조병옥 박사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