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절터는 보문호의 북쪽 현재 서라벌초등학교에서 동쪽으로 약 100미터 떨어진곳에 우치하며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2기가 남아 있다 절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석탑의 존재로 미루어 볼때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것으로
보인다
1938년에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조사 직전에는 붕괴된 석탑들과 주춧돌,기타 석재등
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발굴결과 확인된 건물자리는 금당, 강당, 중문 등으로 금당자리는 일부
지대석과 기초의 규모만이 확인되었고 강당자리는 주춧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으나 동,서 남면에서 적심석'
이 확인되어 기둥의 간격만 알 수 있었다
중문자리는 일부 주춧돌, 적심석 등이 확인되었으나 그 규모는 알 수 없었다 비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삼아 당시 도괴
되었던 탑을 지금보는것과같이 복원하였다 이 조사를 주고나하였던 일인 요네타가 작성한 복원안에 따르면 금당은
앞, 옆면이 가 ㄱ5칸, 강당은 앞면8칸, 옆면3칸, 중문은 앞면3칸, 옆면 2칸이었으며 전체 절터의 규모는 중문에서 강당까지
남북 269척, 동서 200척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발굴조사에서는 금당지와 자우 회랑사이를 발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당지에서 회랑으로나가는 익랑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조사한 사람이 우리나라 쌍탑식 가람을
일본의 쌍탑가람인 소위 약사식 가람배치와 꼭같은것으로 오인하여 금당에서 회랑으로 나가는 익랑이 없는것으로 생각
하였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쌍탑식 가람에서는 이미 불국사, 감은사지, 망덕사지 등에서 익랑의 존재가 확인
되었고 천군리사지 역시 복원안에 의한 금당의 위치와 그에 상응하는 좌우 회랑의 주간 변화를 보면 틀림없이 익랑이
있었을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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