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문화재답사

경복궁

금강석1 2013. 3. 3. 23:29

사적 제117호. 현재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정궁(正宮)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궐(北闕)로도 불린다.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경복궁을 만드는 일이었다. 1394년(태조 3) 12월 4일 시작된 이 공사는 이듬해 9월 중요한 전각이 대부분 완공

되었다.

 

궁의 이름은 〈시경 詩經〉에 나오는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뜻으로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

에서 따왔다.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이곳에 왕들이 머문 기간은 1405년(태종 5) 지어진 일종의 별궁인

 창덕궁(昌德宮)에 비해 훨씬 짧다. 세종·문종·단종이 이곳에 주로 기거했으며, 왕자의 난으로 인한 개성천도 기간

동안 빈 궁궐이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경복궁을 기피해 창덕궁에 기거하면서 임금이 살지 않는 궁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 동궁에서 일어난 화재와 1553년(명종 8)에 일어난 내전일곽의 화재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이듬해 복구되었다.  

 

38년 뒤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든 건물이 불탄 후 270여 년간 폐허상태로 있다가 1865년(고종 2) 대규모 재건공사가 시작

되었다. 1868년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나, 1876년에 일어난 대규모 화재로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 재차

옮기는 등 여러 차례의 피해와 복구가 거듭되었다. 1904년 이곳에 통감부가 들어섰고 1917년 11월에 일어난 창덕궁의

대규모 화재 뒤 이를 복구하기 위해 1918~20년 원래 있던 건물을 해체했다. 또 이곳에서 나온 건축자재의 방매와

국립중앙박물관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립 등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었으나 1996년 12월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 등으로 일부가 복구되었다

 

경복궁은 뒤에 백악(白岳)과 삼각산(三角山)을 등지고 한성(漢城) 중심 좌우에 6조관아(六曹官衙)가 있는 대로광장에

조영(造營)된 궁궐로서 중국의 고대 궁궐을 만드는 법식인 하늘의 별자리를 본뜬 오성좌 배치를 그대로 따랐다. 정전(正殿)

인 근정전(勤政殿)을 중심으로 남북축선상에 주요건물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면서 정전과 편전은 앞부분에, 침전과 후원은

뒷부분에 배치하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직4각형에 가까운 대지 주위를 담장으로 둘러싸고 동문

 건춘문(建春門), 서문 영추문(迎秋門), 남문 광화문(光化門), 북문 신무문(神武門) 등 4개의 문을 만들었다. 궁궐 안은

정문인 광화문으로부터 홍례문(弘禮門)과 금천(禁川)을 가로지른 영제교(永齊橋)와 근정전을 둘러싼 회랑의 정문인

근정문과 정사를 보던 사정전 뒤의 향오문(嚮五門)을 일직선 상에 배치했다.

 

이 사이의 공간은 나랏일을 보고 의식을 행하는 업무공간이다. 향오문 뒤쪽에는 침전과 궁궐 내에 필요한 제반시설이

자리한 영역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과 향오문 사이에는 근정문을 경계로 다시 2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이는 중국에서 궁궐을 구성하는 방법인 삼문삼조(三門三朝)의 구성법을 따른 것으로 2단의 월대 위에 자리한 중층의

 근정전과 이를 둘러싼 회랑을 중심으로 한 이곳은 치조(治朝)에 해당된다. 주로 신하들의 조례를 받던 곳으로 바닥에는

넓다란 박석을 깔고 좌우대칭을 이루어 보다 강한 권위를 보여준다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공간은 외조(外朝)에 해당된다. 침전으로 통하는 노문(路門)인 향오문 뒤에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과 왕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해 그 동쪽에 왕대비가 살던 자경전(慈慶殿) 등 많은 침전들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18~20년 사이에 해체되어 창덕궁의 희정전(熙政殿)과 대조전(大造殿) 등을 보수하는 데 건축

자재로 사용되고 일부는 일반인에게 판매되기도 하는 등 대부분 없어졌다. 현재는 자경전과 교태전 뒤뜰의 아미산(峨嵋山)과

벽돌로 쌓은 굴뚝만이 남아 있다. 이곳에 자리한 많은 보물급 탑들은 조선의 정기를 억압하려는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되어

옮겨진 것으로, 현재는 이들을 다른 장소로 옮기고 옛 모습을 되찾고자 복원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근정전(국보 제223호), 경회루(국보 제224호), 자경전(보물 제809호), 근정문 및 행각(보물 제812호), 사정전, 천추전,

수정전, 집경당, 함화당, 재수각,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의 건물과 경천사10층석탑 (국보 제86호)을 비롯하여 일제

강점기에 옮겨놓은 많은 국보·보물급 석조문화재가 있다. 조선시대의 궁궐 중 으뜸인 곳으로 다른 궁궐에 비해 전체

모습이 정연한 비례체계를 갖추고 있어서 궁궐건축의 배치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근정전 궁궐의 위엄

 

고종이 직무를 보던 곳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국보 제224호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때 대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지금의 경회루는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1867년에 새로 지은 건물로,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가 되는 크고

사각진 인공 연못 안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원래 경회루는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완성하였다. 태종은 창덕궁에서 정무를 보며 경복궁에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연회 장소를

마련하고자 이 누각을 지었다.

 

고종이 서재로 사용하던 건물. 신무문(神武門) 동쪽에 있으며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단층 맞배집이다. 연판(蓮瓣) 등으로

장식된 높은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초석(礎石) 위에는 고복석(鼓腹石)을 사용해 다른 건물과는 다른 면을 보여준다. 기둥

위에 안초공(安草工)을 사용했으며, 두공은 다포식(多包式)으로 첨차(檐遮)의 내외와 양측면에 섬세한 파연초(波蓮草)를

조각했다. 행공첨차(行工檐遮)는 운두(雲頭)가 매우 높아서 소로[小累]가 다른 건물에 비해 높다. 건물 전면의 툇간을 전부

개방하고, 양측면은 박공마루까지 전벽(塼壁)을 쌓았고, 8쌍의 쌍공(雙孔)을 만들었음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경복궁 내의

 다른 건물에 비해 중국적인 면을 많이 지녔다는 것이 특징이다.

 

건청궁(乾淸宮)은 1873년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있기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을미왜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아관파천)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훼손·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미술관을 지었는데,

이 미술관은 해방후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됐다. 2007년5우러20일 일제가 철거한 건청궁이

복원돼 일반에 공개됐다. 건청궁 복원공사는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의 5단계 사업인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04년 6월에 시작돼 3년 4개월 만에 완공됐다.

 

건청궁내에 복원된 장안당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원래의 이름은 오문(午門)이었으나, 세종때에 와서 광화문으로 명칭이

바뀐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으나, 광화문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잠시 이동하였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2010년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15일 광복절에 공개되었다.

 

 

 

광화문앞 도로 전경

 

경북궁내 수문장 교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