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시절/고향생각

[스크랩] 안동시가지 옛 지명유래

금강석1 2009. 12. 4. 19:57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시는?..안동

 

 


시군 통폐합 이전에 지정문화재가 가장 많았던 고장은?.. 안동
정답은 둘 다 '안동'이다.


안동시가 면적 기준으로 가장 큰 시가 된 것은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1992년 통계로 국보와 보물 등을 포함해 국가 또는 시도가 지정한 문화재는
안동군이 178점으로 가장 많고 경주시가 173점으로 그 다음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안동본부(安東本府) 지도1 - 永嘉誌 참조

 

1943년 안동 - 태화동

 

1946 안동 - 낙동강

 

1950년 안동 - 사장뚝

 

1956년 안동시

 

1964년 안동 - 임동면

 

 내고향 안동 - 풍산면

 ▶ 옥마·옥(獄)거리·옥동(玉洞)
안동부의 감옥이 있던 곳이라 하여 옥거리, 옥마, 옥리 등으로 불렀으나, 1914년 7월 5일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옥동이라 하였다가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 실시에 의하여 5개정으로 갈라서 팔광정, 4정목, 6정목, 상반정, 옥동정으로 되었다.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옥정목을 옥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아파트와 여러 상가들이 들어서 있어 안동의 또 다른 번화가로 발전하고 있다.

  


1950년도 안동시가지


60년도 안동시가지

▶ 관청골
옥동에서 가장 큰 써릿골의 동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옛날에 이 지역은 하양부곡(河壤部曲)에 속하였던 곳인데 하양부곡민을 다스리기 위한 관청이 이 곳에 있었다 하여 관청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 뱃머리·뱀머리·사두(巳頭)
마을의 지형이 뱀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뱀머리라고 하는 설과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소금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라 해서 뱃머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 써릿골·써랫골
옥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서 그 지형이 써래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 미륵댕이·미륵당(彌勒堂)
마을 뒤 산골짜기의 암반을 등지고 연대 미상의 좌고 165∼175㎝ 정도의 미륵이 남향(南向)하여 돌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절골
하이마의 일부인 웃골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고 절의 이름이나 건축 연대 등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 추자나뭇골
써릿골의 북쪽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서 추자나무(호도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갯마·낙양촌(洛陽村)
원래는 수하동(水下洞)의 앙실 앞의 강변이 낙양촌인데 그 건너편인 이곳도 낙양촌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한편 갯마라는 지명은 개펄로 이루어진 지대라 하여 갯마로 불리어지고 있다.

▶ 땅너머·당너머·땅너메·닥너머
밤나무골(지금의 성좌원) 동쪽에 있는 골이며 산마루에 당(堂)이 있었기 때문에 당너머라고 하며 또 닥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닥너머라고 한다.

▶ 하이마·하임하동(下臨河洞)
옥동의 낙동강변(洛東江邊)에 위치한 마을이다. 고려 말기 서씨(徐氏) 문중의 정승 한 분이 타계하자 강 건너 산기슭에 묘를 쓰기 위해 땅을 파는데 큰 바위가 묘 자리 밑에 깔려 있었다. 바위를 들어내기 위해 바위를 조금 들었는데 그 바위 밑에서 학이 한 마리 날아가서 그 때부터 이 마을을 학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마을의 음이 차차 변하여 하이마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임하(臨河)에 대한 아랫마을이라는 뜻으로 하임하라 하였다가 그 음이 변하여 하이마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안동 소市場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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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티·송현(松峴)
본래 안동부 부내면 지역으로서 솔티고개가 있으므로 솔티라 했으며 느티나무골과 수고내미골로 나뉘어지는데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송자(松字)가 든 곳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 마을은 안전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서 거대한 아파트촌이 되었다.

▶ 물개골·모래골·사곡(沙谷)
무나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빈수골과 쏙은빈수골, 독집골로 나뉘어지며, 후삼국시대 견훤군과 고려 태조가 싸울 때 견훤 군사가 이 개펄 모래 위에서 몰살했다고 해서 몰개골이라고 하고 또 이 일대가 모래로 되어 있어 모래골, 몰개골이라고도 한다.

▶ 반골·방골
합전다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골이 길지 않고 다른 골짜기 길이의 반밖에 되지 않아서 반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느티나무골
이 마을에 수령 2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다고 하여 유래된 명칭이다. 현재 느티나무 3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 합전(合戰)
견훤군과 고려 태조가 거느리는 군사가 회전(會戰)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다. 고려 태조는 병산(甁山)에 진을 치고 후백제 견훤은 석산(石山)에 진을 쳐서 격전 끝에 고려 태조가 이곳에서 견훤을 파하고 고창군(古昌郡)을 평정하였다고 한다.
◇ 합 전 교:현재 50사단에서 예천방면으로 올라가면 옥동과 사단 뒤쪽으로 나가는 사거리가 나온다. 합전교는 이 사거리에 있었다. 현재는 하천을 복개하여 다리는 사라지고 없다. 합전 교의 명칭은 왕건과 견훤이 여기서 진을 치고 싸웠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 호암(豪岩·虎岩)
범이 누워 있는 형상을 가진 산이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호암이라고 한다. 또 낙동강변에 위치한 마을로서 강변에 호걸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바위로 인하여 낙동강에 홍수가 나도 호암이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한다. 이 바위는 원래 한 개이었으나 어떤 장군이 은거해 있다가 막곡동의 석문정으로 간 뒤 갈라졌다고 하며 그 윗바위는 흔들면 흔들리는 채로 얹혀 있다고 한다.

▶ 솔밤·송야(松夜)
이 마을은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권씨(權氏) 성을 가진 선비가 개척하였다. 천등산(天燈山) 줄기에 있는 솔이 밤에 유난히 빛난다 하여 솔밤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행개골, 구름장골, 방갓골의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안동 전경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안동




오른쪽 아래는 안동 강남 아파트. 건너편에 강변의 실내체육관, 저 멀리 안막골의 아파트. 




바로 아래는 막곡, 물 건너편은 하이마.  무릉 넘어가는 고개길이 오른쪽에 보이고 아래는 무주무 동네




안동시민운동장. 낙동강에 걸쳐있는 중앙선의 안동철교와 인도교. 아래 오늘쪽은 안동 강남의 아파트




남선에서 바라본 안동시내.




안동댐과 보조댐. 법흥다리. 오른쪽 물줄기는 안동 임하댐에서 내려오는 반변천
  



▶ 공원마·공원촌(公園村)
서악사(西岳寺) 아래에 있는 터로 전에 안동시민의 공원이 있었다고 하며 광복 후에 이곳에서 동채싸움도 하였다. 현재는 중앙고등학교와 경덕중학교가 있다.

▶ 삼거리·삼걸
공원마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세 갈래의 긴 길이 있어 삼거리라 불렀고 현재 안동중학교(安東中學校)의 윗쪽이며 옥동이 발전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세 갈래길은 오거리로 변하였다.

▶ 새마·신촌(新村)
공원마 남쪽에 있는 마을로 광복 후에 새로 형성한 마을이라 하여 새마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주택이 많이 들어서고 주공아파트가 있어서 주민들의 수가 많으며 이로 인하여 조그만 장터가 형성되었다.

▶ 원골·원동(院洞)
태화봉(太華峰) 밑 삼거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자제원(慈濟院)이 있었다 하여 원골, 원동으로 불러진 마을이다.

▶ 불미골·총곡(銃谷)
원동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대장간을 설치하였던 곳이라 하여 불미골이라 불렀다가 일제강점기 때 사격장이 있어서 총골이라고 다시 불리게 되었다.

▶ 임방앗골
총골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큰 바위가 있고 임씨(林氏)가 방아를 놓았다고 하여 임방앗골이 되었다고 한다.

▶ 말구리
삼거리에서 예천방면으로 약 500m정도 떨어진 지점에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말구리재라 한다. 지금은 서쪽에 성창아파트와 안동공업고등학교가 있다.

▶ 어개골·어가동(魚哥洞)
공원마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어장자(魚長者)가 살았다 하여 어개골이라 불리어지고 있으며 남쪽 둑 너머로 낙동강이 흐르고 뒤쪽은 태화동 기슭으로 따뜻한 양지(陽地)마을이다. 현재 이 마을에 안동생명과학고등학교가 있다.

▶ 어벽제골·어벅적골
이 마을에 어복사란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지비서리·제비서리
말구리재 부근에 있었으며 옛날에는 도적이 자주 출몰하여 행인을 괴롭혀 이 곳을 지나가기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 송골굼·송굴굼이
서악사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쪽이 넓고 입구가 좁아 송곳구멍 같다고 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 관왕묘(關王廟):서악사 동쪽 언덕에 있다.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의 경리관(經理官) 설호 신(薛虎臣)의 명에 따라 건립했다 한다. 묘 안에는 석상(石像)이 있는데 이것은 영남산(映 南山)에서 솟았다는 전설도 있으며 이 터가 호두형(虎頭形)이므로 장군(將軍)을 모시면 지 덕(地德)이 눌린다 하여 터를 잡았다 한다.
◇ 수 바 위:안동김씨의 부인이 낙동강 건너 산에 모신 시부(媤父)의 무덤을 향해서 망배 (望拜)(도강(渡江)하지 못할 때)를 이 바위 위에서 올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화심골(花心谷)·월남골(越南谷)
이 마을에 월남골이라 이름이 붙여지기 전에는 안동김씨 화심(花心) 묘소(墓所) 보호석(保護石)이 마을 입구에 있어 화심골이라 불렀다. 그 후 월남 파병 전사자 및 울진무장공비소탕 전사자 유가족을 위한 시영(市營) 주택(住宅)을 건립한 데서 월남골이란 지명이 붙여진 것이다.

▶ 포도골
포도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불리어지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말엽까지 포도나무 단지로 유명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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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장터?구시장(舊市場)
대밭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며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5일마다 서는 안동의 큰 장터였다.
현재 이 자리에 상설시장이 들어섰다. 안동의 중요한 상가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옥야동의
신시장에 비해 일찍 형성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늠갓?농비?늪갓?늪갓동네
법흥에서 서악사(西岳寺)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로서 불화(佛花)인 연꽃이 많은 연못과
늪이 있었다. 늪가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늪갓, 늠갓, 농비라 하였으며 지금은 안동초등학
교가 자리하고 있다.

▶ 연늪?연늪터
구시장 부근에 연꽃이 많은 못이 있었고 여기에 안개가 올라와 항상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한
다. 마을 명칭은 목성산에서 내려다보면 연잎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이곳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서 상가지역이 되었다.

▶ 대밭골?죽전?죽전동(竹田洞)
현재 금성예식장의 부근이며 옛날 이곳에 대밭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마을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시내중심지로 죽전(竹田)의 흔적은 볼 수 없다.

▶ 서문안?서문내동(西門內洞)
안동부성(安東府城)을 중심하여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이 있었는데
그 중 서문(西門)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문안이라고 하였다.

▶ 지변(地變)?지변동(池邊洞)
늪갓의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연못의 변두리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지변동이라는 명
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땅의 모습이 자꾸 변한다는 뜻에서 지변이라고도 하며 연못에서 때
로는 들이 끊어 올라 변경(變更)을 많이 시켰다고 하여 붙인 것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을 중심
으로 안동의 동채싸움이 많이 시행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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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문거리?북문가(北門街)
본래 안동부 동부의 지역으로서 안동부성의 북문이 있었으므로 그에 접한 거리를 북문거리 또
는 북문통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율세동(栗世洞)의 일부를 잘라서 이곳에
있는 태사묘(太師廟)의 이름을 따서 태사정(太師町)이라 하다가 1947년 일본식(日本式) 동명
을 변경할 때 북문동으로 고쳤다.

▶ 북문안?북문내리(北門內里)
안동부의 북문 안쪽에 있는 마을로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직업은 주로 상점을 경영하여
생활하고 있는 곳인데 북문 안쪽이라는 데서 마을 명칭이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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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뭇돌?삼맷돌
현재 안동시보건소 앞에서 동쪽으로 삼뭇들, 장거리들이 있어서 삼뭇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
었으며 당시 이 지역에는 객사(客舍)가 많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의 삼산동 일대로
안동시 중심부이며 인구가 밀접해 있고 조흥은행, 우체국, 농협중앙회 등의 공공기관이 있다.

▶ 종로(鐘路)
옛날 이곳에는 제남루(濟南樓)라는 종루가 있었다. 안동부 당시 안동의 수령이 이 제남루 앞에
많은 백성들을 모아 놓고 죄인을 다스려 백성들에게 일벌백계(一罰百戒)의 교훈을 일깨웠다
하며 종루가 있는 거리라 하여 종로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중앙파출소에 이르는 통로를 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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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재?잿골?성지동(城池洞)
이 마을을 옛날에는 꼬재라 부르다가
당시 산중턱에 집이 2채 있어서
사람이 법상동에서 재를 넘고 다녔다 하여 잿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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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성(木城)
목성산(木城山)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목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산 모양이 누에 머리 모양
으로 생겼고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많이 먹였다고 한다.

◇ 목 성 산:안동시내 북쪽에 지금 목성동 성당이 잡고 있는 나즈막한 산을 목성산이라 한다.
목성산을 다른 말로 잠두산(蠶頭山)이라고도 하는데 일제강점기 초기만 하더라도 목성산 주
변 기슭은 뽕나무밭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뽕밭은 목성산과 접하고 있는 서당골과 법석
골에도 뻗쳐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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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교골?교동(校洞)?명륜동(明倫洞)
옛날 향교가 있었던 골이라 하여 향교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향교의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의
이름을 따서 명륜동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이 향교 터는 안동에서 이름난 명당(明堂)으로 안동
에 신식학교가 세워질 때는 대개 이 자리에서 시작했다. 바로 안동사범, 안동교대가 그 향교 터
에 있었고 안동대학교가 송천동으로 이전하기 전에는 이곳에 자리잡았으며 현재는 안동시청이
들어섰다.

◇ 동들배기:향교골 안쪽 산 위 고분이 있는 곳의 이름으로 고분(古墳)에서 귀걸이와 금관(金
冠), 요대(腰帶) 등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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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이골?쳉이골?치곡(雉谷)?냉천(冷泉)?화장실곡(火葬室谷)
마을의 모습이 꿩처럼 생겼다고 하여 치곡이라 불렀으며 주로 산골의 전답으로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화장장(火葬場)을 설치하여 화장실골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화장장은 딴 곳으로 옮겼
고 깨끗한 주택들이 들어서서 마을을 새로 이루고 있으며 경일고등학교까지 여기에 설립되고
아파트가 들어서서 크게 번성하고 있다.

▶ 딱밭골?저전동(楮田洞)
옛날에 닥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던 골이라 하여 딱밭골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닥은 전혀 없고 마
을 입구로부터 거의 전부가 주택이 들어서서 아담한 마을이 되었다.

▶ 작은 딱밭골
딱밭골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역시 옛날에 닥나무가 많이 있었던 골인데 규모가 작다고 하
여 작은 딱밭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현재는 그 흔적은 없고 주택지로 바뀌었다. 

▲ 안동시 전경

안동시가 가장 중점을
▶ 뱀발골?부처바우골?불암곡(佛岩谷)
옛날에 한 행인이 이곳을 지나가는데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서 입을 맞추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 연후에 이곳은 지신(地神)이 발동한다고 해서 지신을 누르기 위해서 미륵불(彌勒佛)을 세
우고 부처바우골이라 ?杉? 한다. 이 미륵불은 퇴계로(退溪路) 확장 공사로 현재 안동대학교에
옮겨 놓았다.

▶ 배나뭇골?배남골?백나무골?회나무골?이동(梨洞)
신안동 남쪽 첫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배나무가 많이 있어서 그렇게 불리어졌다고 한다. 또 100
여 종류의 나무가 있어서 백나무골이라고도 하며 100년 묵은 회나무가 있다 하여 회나무골이라
고도 한다.

▶ 인결골?인정곡(人定谷)
옛날 이곳에서 유기를 만들어 왔는데 유기는 물론이고 시간을 알리기 위해 밤마다 치던 종(鍾)
인 인경을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 쑥머리?수머리
쑥머리는 현재의 금탑아파트에서 안막동의 범서골 입구까지가 모두 포함된다. 당시에는 늪이
있어서 수머리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쑥머리로 되었고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좋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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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적골?밤저골?율세동(栗世洞)
이 마을의 명칭은 고려시대부터 불리던 지명이며 밤나무가 많이 있는 골이라 하여 밤적골이라
고 하였다. 또 안동의 동쪽에 있는 지역으로서 큰 절이 있었으므로 밤절골이라고 하였다는 이야
기도 전해진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세리(新世里)와 안막리(安幕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율세동이라 하였다. 그 후 1931년 읍제(邑第) 실시에 의하여 일부를 갈라서 앵정이라
하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옥정동에서 율세동으로 다시 분리되었다.
이 골짜기 양쪽에 호암(虎岩)과 적암(賊岩)의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들이 서로 싸우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안동부에 살인사건이 많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에 안동부사 김가진이 부임하여
이곳에 장인촌을 만들어 장인들을 살도록 하여 그 방패(防牌)가 되도록 하였더니 살인사건이 일
어나지 않았다 한다. 그 바위는 안동 가톨릭상지대학과 주택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 도화동(桃花洞)
밤적골 뒤의 골짜기에 있던 마을로 도화천이란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밤적골
맞은 편에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었으나 1970년부터 가톨릭상지대학이 설립되면서 대학 부지에
편입되어 지금은 도화동에는 민가가 흔적조차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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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정리(新井里)?옥정동(玉井洞)
본래 안동부 동부의 지역으로서 맑고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신정리라 하였다. 1914년 7월 5
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율세동에 편입되고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安東邑制) 실시에 따라
율세동의 일부를 잘라서 앵정이라 부르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옥정(玉井)으로
고쳤다.
옥정동의 우물은 감리교회 정문 맞은편 집과 농협중앙회 앞 음식의 거리 입구 부근의 개천 그리
고 구군청 앞에 있었다고 한다. 옥정은 원래 밤에도 물밑이 훤하게 밝아서 어두운 한 밤중에도
물을 기를 수 있었고, 여름날 날씨가 가물어서 시내의 모든 샘물이 말라도 옥정은 늘 물이 풍족
하게 넘쳤다고 한다. 그래서 멀리 법석골이나 잿골 주민들이 물지게를 지고 옥정동의 옥정까지
물을 얻으려 왔다. 그러나, 어느 때 도둑이 샘물 밑의 옥돌을 훔쳤다고 한다. 그 때부터 옥정이
어두워졌는데 물은 그 후에도 전혀 줄지 않고 솟았다고 한다.

▶ 동문거리
동쪽 관문이라는 뜻에서 불리어지며 안동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성내는 상인이 살았고 성외에
는 양반들이 살고 있었다 한다. 이때 양반들이 성안에 살고 있는 상인(常人)을 일컬어 성안 것들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양반과 상인이 사는 지역을 구별하기 위하여 성내로 들어가는
동쪽 관문을 동문거리라 일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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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흥골?법흥(法興)
지금의 임청각(臨淸閣) 부근으로 신라 때 법흥사(法興寺)가 있어서 이 일대를 법흥이라 하였다. 그 당시에는 탑골과 평지가 포함되었다. 고성이씨가 그 지역에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
었다고 한다.
▶ 고갯길?괘목?괴목(槐木)
현재 안동댐 입구 부근에 있는 조그만한 고개마루를 중심으로 해서 서편과 동편에 촌락을 이루
어 오가는 사람이 잠깐 멈추었다 가는 고개머리에 괴목(槐木)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선농단(先農團):부의 동쪽 이(二)리 포항(浦項) (지금 법흥동 부근)에 있었다. 신농씨(神農
氏)(농사를 처음 가르쳤다는 태고 때 중국의 임금)와 후직씨(后稷氏)(순(舜)임금 때 농사를 다
스린 인물)를 제사하는 선농단은 일찍 신라 때부터 받들어 왔다. 고려 시대 이래로 임금이 친
히 적전(籍田)(임금이 농사짓는 논밭)에 밭갈고 신농씨와 후적씨에게 제사(대개 2월) 했으니,
정도전(鄭道傳)이 '농사는 모든일의 근본이요, 적(籍)은 농사를 권장하는 근본이니 임금이 친
히 적전에 밭갈아 농사를 먼저 함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남무(南畝)에 나가 농사에 참여 하는지
라. 이래서 적(籍)은 권농의 근본이다.'­농자만사지본야(農者萬事之本也) 적자권농지본야(籍
者勸農之本也) 인군친경적전(人君親耕籍田) 이선어농이인인개(以先於農以人人皆) 부남무이
농사흥의(赴南畝而農事興) 고일적자권농지본(故日籍者勸農之本)­라고 했다. 지방 각 고을에
도 선농단이 있었으니 각기 수령이 제사를 받들어 백성에 농사를 힘쓰게 했다.

▶ 동성(東城)
신라말 동쪽 법흥사(法興寺) 뒷산 능성에 안동을 지키는 토성(土城)이 있어 이 일대를 동성이라
불러 왔다. 옛날 이곳에는 안동교도소가 있었으며 현재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 탑골?탑곡(塔谷)
안동댐 진입로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칠층전탑(七層塼塔)이 있는 뒷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고성이씨들이 터전을 잡았다.

▶ 평지(平地)?평리(平里)
탑골 남서쪽의 마을로 넓은 경작지가 있어서 평지 또는 평리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에 살았던
고성이씨의 이헌복(李憲復) 선생의 호가 평지옹(平地翁)이므로 지금도 그 자손들을 평지인(平地
人)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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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골(聖智谷)?성진골(聖眞谷)
신라시대 성지도사가 법흥사 창건 후 이 법흥사를 중심으로 북암(北庵), 남암(南庵), 동암(東庵),
서암(西庵) 등 4개의 암자(庵子)를 설립하였다. 성지도사가 4개의 암자 중 북암에서 기거하였기
때문에 성지골이라 일컬었으며 지금도 고와(古瓦)가 발견된다. 현재는 성진골로 부르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옥룡사(玉龍寺) 건너편에 있으며 암석에서 물이 솟
아나 가뭄이 심해도 샘물은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 옥정당(玉井堂):옥룡사 뒷산 봉우리를 옥정당이라 부르며 옛날 선녀가 이 옥정당에서 놀
았다 한다. 물이 좋은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잠방골
성진골 북쪽 영남산 중턱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다가 장을 담구었다 하여 잠방골이라 부르게 되
었다고 한다. 이 우물물은 아무리 가뭄이 심하여도 샘물이 마르지 않았다 한다.

▶ 새절골?새적골?신세동(新世洞)
옛날에 새 절이 있었다 하여 새절골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1947년 동명 변경에 따라 신세동에 속
하게 되었고 현재는 영남산 중턱에 집을 지어 오손도손 정답게 살아가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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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앗골?쌍아골?상아동(象牙洞)
상아동의 원마을로 지형이 상아(象牙)처럼 생긴데서 연유되었으며 코끼리 이빨에 해당하는 자
리에 큰 나무를 심었다고 하나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다. 1914년에 안막동에 편입되었다가
1947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상아동이 되었다.

▶ 번뎅이?먼데이
번댕이는 버그재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유래되었으며 골짜기 어구인 진모래에서 거리가 멀다
고 하여 먼데이라고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 놋가마골?놋감골?가마골?진모래아랫골
이 마을에 어떤 부자가 살았는데 장례를 치룰 때 놋가마를 만들었다 하여 그 이름이 놋가마골이
라고 유래되어 오다가 가마골로 불려지고 있으며 또 그 위치가 진모래의 아랫쪽에 있다고 하여
진모래아랫골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버굿재?안맞재?청머리재?안막재
옛날 와룡, 도산, 예안에서 안동의 시장으로 소를 팔러 오다가 풀이 많은 이 고개에서 풀을 뜯어
먹여 소의 배가 벗구처럼 되었다고 하여 버굿재라 불리게 되었으며 또한 이 재에는 푸른 풀이
많은 재라고 하여 청머리재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안동시에서 약 2㎞ 떨어진 곳이며 지금은 집
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안막골에서 상아골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이기 때문에 안막재라고도 하
는데 요즘은 이 명칭을 많이 사용한다.

▶ 성낭골?석낭곡(石郎谷)
이 마을에 돌이 유난히 많다고 하여 석낭골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 잔자라기?잔다라기
이 마을에 아주 작은 밭과 논이 많아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지금은 작은 밭뎅이와 농뎅이
를 확장 정리하여 농토를 가꾸고 있다.

▶ 절골
이 마을에 아주 큰 절이 있었기에 그 연유로 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절은 사라지고 그 자
리에 배씨(裵氏) 재사가 지어져 있으나 절골이란 이름은 그대로 불려지고 있다.

▶ 진몰개?진모래?장사리(長沙里)
마을 앞의 낙동강에 긴 모래톱이 있어 진모래라 불렀다. 이 마을에는 삼태사와 견훤에 대한 전
설이 있는데 견훤은 원래 지렁이의 화신이었다고 한다. 전시에는 모래땅에 진을 쳐 신변이 위태
롭게 되면 지렁이로 변해 모래 속으로 들어가 버려 웬만해선 그를 물리칠 수 없었다고 한다. 삼
태사가 ?卵퓽? 도와 현재의 안동군 와룡면 서지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견훤은 그 동쪽 낙동강변
모래땅에 진을 쳐 대전하였다. 싸움이 수십 번 계속되었는데도 끝이 나지 않고 견훤은 싸움을
하다 불리해지면 모래 속으로 기어 들어가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삼태사들은 전략을 세
워 흐르는 강을 막아 못을 만들고 못 속에 소금을 수 없이 넣어 염수를 만들어 놓고 접전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싸움이었다. 견훤은 점점 불리해지자 당황하여 지렁이로 둔갑하더니
모래 속으로 기어들었다. 삼태사는 이때다 하며 염수의 못물을 터트렸다. 소금물이 흘러내리니
아무리 둔갑한 지렁이 일지라도 견딜 재주가 없었다. 견훤은 겨우 목숨만 건져 패주하여 안동
땅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지금도 이 내를 소금물이 흘렀다 하여 간수내(서지동에 있는 마을로
음이 변해 가수내로 불리운다)라 부르고 견훤이 숨었던 모래를 진모래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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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들?마뜰?마평(馬坪)?용상(龍上)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안동에 피난왔을 때 기산(岐山)에다 성을 쌓고 이곳에서 말을 먹였다고 한다. 옛날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부임했을 당시 비만 오면 낙동강가의 제방이 유실되더니 하루는 마씨(馬氏) 성을 가진 사람의 꿈에 청룡(靑龍)이 나타나 선어대(仙漁臺)에서 황룡(黃龍)과 등천(登天) 시합을 할테니 황색 물이 끊는 곳에 칼을 던져 달라고 부탁하였다. 마씨가 그대로 하자 황색 기운(氣運)이 없어지고 뇌성벽력을 치며 청룡이 등천에 성공하고 고마움의 뜻으로 여기 들판을 마씨에게 주었다. 그래서 이 마을을 마씨의 들 즉 마뜰이라고 하였다 한다.

▶ 선어대(仙漁臺)와 마뜰
옛날에 늙은 총각머슴이 해마다 되풀이되는 머슴 생활에 질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강물이 굽이치는 언덕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빠져 죽으려는 순간 예쁜 여인이 손목을 잡고 "소녀는 이 아래 소(沼)에 사는 인어(人魚)입니다. 당신이 세상을 버리려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숙명(宿命)의 그물을 억지로 벗어나기도 어려우니까 소녀의 말을 따르면 좋은 길이 열릴 것입니다. 지금 소녀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려고 하는데 임하에 사는 용이 번번히 방해를 하니 내일 여기서 소녀가 용으로 화하여 하늘로 오르려면 필경 저 위의 임하룡(臨河龍)이 나타나서 맞붙어 싸울 것이니 낭군님은 큰 소리로 '야 이놈아'하고 소리만 쳐주면 그 소리에 임하룡이 한눈을 팔면 그를 물어 죽이고 하늘을 오를 수 있습니다.?하여 머슴은 그렇게 하기로 승낙을 했다. 이튿날 밤 다시 그 자리로 나갔다. 갑자기 번개와 천둥이 요란하고 돌이 용솟음 치더니 어둠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을 보고는 겁에 질린 총각은 기절하고 말았다. 인어룡(人魚龍)은 아무리 기다려도 기척이 없자 싸움을 포기하고 내려와 보니 머슴은 기절해 있는게 아닌가. 총각을 일깨워 그 간의 사정을 듣고 난 인어룡은 '이번엔 안타깝게 실패했으나 내일은 꼭 성공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튿날이었다. 싸움은 절경에 달해 있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야 이놈!'하고 소리를 질렀으나 모기 소리만큼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보람이 있어 임하소(臨河沼)의 용이 헛눈을 파는 순간 인어룡은 임하룡의 목덜미를 힘껏 물어뜯어 승부를 끝냈다. '소녀는 이제 승천하겠사오니 낭군님은 급히 짐을 꾸려 뒷산 높은 봉으로 올라가시면 약속대로 하겠사옵니다.' 용이 시키는 대로 하자 온 천지는 물바다였다. 날이 새자 머슴은 넓은 토지를 얻어 농사를 지었다. 이 머슴의 성이 마씨(馬氏)였으므로 마씨의 들 즉, 마뜰이라 불리게 되었고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용상(龍上), 인어룡이 사람으로 나타난 물가 언덕을 선어대(仙漁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쑥쟁이?쑤쟁이
이 마을은 마뜰 남동쪽 벌판에 있다. 옛날 낙동강의 지류가 곧게 안동부를 뚫고 흘렀는데 읍터를 돕기 위하여 이곳에 버드나무와 잡목을 많이 심어 큰 수풀을 이루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영해와 영덕에서 오는 고기장수와 등짐장사들이 안동으?다닐 때 숙박하던 마방집이 있었다고 한다.

▶ 자앞?척전
이 마을은 안동댐 보조댐 부근에 있다. 안동의 호족인 권행(勸幸),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 등이 진모래에 포진하고 있는 견훤의 군사 동태를 사전에 세밀히 파악하여 일격에 격파시키매 그 예견과 작전 계획이 자로 잰 듯이 치밀하였다는 데서 마을 명칭이 생겼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거의 부르지 않고 있다.

▶ 합강
개목나루와 와루탄 두 갈래의 물이 합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 안동병원 앞쪽이다. 개목은 황지(潢池)에서 비롯되어 도산(陶山)에 이르는 탁영담, 여산 기슭를 거쳐 개목나루에 이른다. 고을 터에서는 물이 동북으로 와서 남서로 나간다. 와부탄은 영양(英陽) 일월산(日月山)에서 진보(眞寶)를 지나 임하의 남지곡(南枝谷) 물과 합쳐 비이연(飛鯉淵)이 되며 합강에 이른다. 합강에서는 호소(湖沼)를 이루고 서쪽으로 영호루, 청성산, 망천, 곡강, 병산, 구담을 지나 상주에 이른다.

▶ 장거리?길거리?정(程)거리
이 마을은 길거리 또는 정거리를 말하는 곳으로 제방축조가 튼튼히 되어 있다. 예전에는 제방 안에 우시장(牛市場)이 열리고 있어 안동시 근교에서 장날이면 소를 몰고 오는 소장수들로 들끓었다고 한다.

▶ 꺽지바우, 꺽시방우, 거시암(巨屍岩)
마뜰 앞 낙동강가의 제방 입구에서 약 50m 떨어져 꺽어지는 곳에 바위가 있었다. 이 튀어나온 바위에 물이 부딪치면 안동의 천방(川防)이 터지고 반대로 정거리 들은 넓어졌다 한다. 꺾어지는 곳에 있는 바위라는 데서 혹은 바위모양이 거시(거위) 모양이라는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 증돌?중평(中坪)
이 마을은 용상초등학교가 있는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용상동의 중심되는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깃대배기?푯대배기
중돌 뒤에 있는 높이 217m의 산으로 세부측량의 푯대가 박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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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왕데이
이 마을은 신비의 수박으로 잘 알려져 있는 평화사(平和寺)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고려 공민왕이 피난을 왔을 때 이곳에서 궁녀와 마부가 죽자 그 후 안동에 역질과 흉년이 돌아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리니 변고(變故)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 후 한집 두집 사당 주변에 집을 짓고 살면서 선왕데이라는 마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사당 주변에 토성(土城)을 쌓아 동?서?남문을 매고 토성 윗부분에 말 다섯 필이 달릴 수 있게 오마도(五馬道)를 내었다고 전해지며 높은 봉 위에는 깃발을 꽂아 강 건너 안동부에 연락을 취했다는 깃대봉도 있다. 그 후 사당을 큰 호랑이 두 마리가 지키고 있었으나 산림이 황폐해지자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지금도 사당 주변에 기왓장이나 질그릇 조각이 보이고 있으며 사당은 1800년대에 중수(重修)했다. 지금도 동민들이 음력 대보름날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또 이 성황당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만나 남하(南下) 파천(播遷)하여 이곳에 이르렀다. 이때 왕이 한 여랑(女娘)을 데리고 와서 늘 귀여워하여 가까이 두게 되었다. 왕은 이곳에 성을 쌓고 홍건적과 싸움을 했다. 여랑과 함께 싸움터를 둘러보러 나섰다가 홍건적의 복병이 왕을 향해 쏜 화살을 여랑이 대신 맞고 쓰러지게 되었다. 왕은 간호에 힘썼지만 여랑은 홍건적을 물리치고 성을 지키는 신이 되겠다고 유언한 뒤 마치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후 싸움은 평정되어 왕은 다시 환도하게 되었지만 여랑을 잃은 슬픔에 이곳에 당집을 짓고 여랑신사(女娘神祠)라 하고 안동부사로 하여 매년 정월 보름에 당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것이다.

▶ 앞시골?도둑골
옛날 조그마한 못이 있었던 골이다. 지금은 못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나 못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 마을은 금(金)을 채굴했던 곳이기도 하다. 앞시골 막바지에는 옛날 산적이 살던 곳이라 해서 도둑골이라고도 한다.

▶ 잿골?척곡(尺谷)
이 마을은 고개가 많아 잿골이라고 하였다. 또 성이 있었던 동네라 하여 잿골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곳은 효심이 지극한 아들이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이 곳에서 살기 시작하여 그 후부터 약 300년간 그 후손들이 살아오고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척골이라고도 불렀다.

▶ 황새골?황사곡(黃寺谷)
마을의 모양이 황새를 닮았다고 하여 황새골이라고도 하며 옛날 황사(黃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라 하여 황사곡이라고 불렀다.

▶ 개미골
잿골에서 북서쪽 0.5㎞ 지점에 위치하는 마을로 지형이 개미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개미골이라 부르고 있다. 개미의 머리 부분을 웃개미골, 허리 아랫부분을 아랫개미골이라고 한다.

▶ 남산
안동댐 주차장에서 북동쪽 1㎞지점에 위치하며 댐 건설 이전에는 여러 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수몰로 인해 현재는 1가구만이 살고 있다. 댐 건너 맛제 마을에서 보면 남쪽에 있다고 하여 남산이라 불렀다. 소나무 숲이 우거져 매우 경치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 음담골?엄달곡(嚴達谷)
안동댐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산이 높아 응달이 되어서 음달골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아래에 안동민속박물관이 있다.

▶ 딱밭골?당밭골
딱박골은 잿골에서 북쪽으로 3㎞ 정도 떨어진 안동댐 주변에 위치한다. 한지를 만드는 닥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명칭이다.

▶ 자루골?자뒷골?척후골(尺後谷)
이 마을은 잿골의 뒷편에 있다고 하여 척후곡이라고 불렀다고 하고 또 골짜기의 모양이 자루 같이 입구가 좁고 안이 넓어서 붙여진 명칭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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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실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배찬(裵讚)이라는 선비가 처음으로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지형이 떡을 찌는 시루 모양으로 되어 있고 방 모양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석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삼밭골
이 마을은 안동포(安東布)를 만들기 위하여 대마를 재배하던 밭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삼밭골이라 하며 이 마을에서 생산된 삼의 품질이 우수하였다고 전한다.

▶ 매일?마일(馬日)
마을 안에 말을 기르면 잘 자라는 야산초지(野山初地)가 있었다 하여 마일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영양천씨(潁陽千氏)가 주로 살고 있다.

▶ 사일(砂日)
이 마을은 진천송씨(鎭川宋氏)들이 개척한 마을이며 토질이 모래땅이라 하여 사일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은 안동대학교 뒷편에 위치한다.

▶ 다라골?월래곡(月來谷)
마을이 어떤 귀인이 달맞이하였던 곳이라 하여 월래곡이라 부르고 또 다라골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가티?갈현(葛峴)
이 마을은 칡덩굴이 많은 자연마을이다. 이러한 연유로 갈현이라 불렀던 것이 음이 변하여 가티라고도 부른다. 진천송씨들이 주로 살고 있다고 한다.

▶ 원당실
인근 6개의 자연마을마다 당(堂)을 모시고 있었으나 마을 전체의 제사를 모시던 당이 이 마을에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감성골?감승골?감성곡(甘城谷)?감송곡(甘松谷)
용상동에서 북동쪽 약 4㎞에 위치한 마을로 처음 우씨(禹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옛날 군사 요충지로 축성(築城)이 있었다 하여 감성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감나무가 많아 감송골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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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동(東部洞)
안동부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부라 한다. 용흥, 운흥, 입석, 율곡, 신정, 원북등 6개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동문내동, 운흥리, 서문내동, 천리, 신세리, 용하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중부동이라 하였다. 그 후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 실시에 의하여 본정(本町) 2정목(町目)이 되었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다시 동부동으로 고쳤다.

▶ 귀다리목
옛날 한 여인이 멀리 떠나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귓밥을 만지면서 기다리던 오솔길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동문거리
신라 때부터 동서남북을 가리켜 그 지역의 지명을 붙여왔는데 안동은 옛부터 동악(東岳), 서악(西岳), 남악(南岳), 북악(北岳)으로 명명되었다. 고려말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왔을 때 이 지역 일대를 동부마을이라 하고 이 마을의 입구를 동문거리라 했다
▶ 동헌뒤
동헌(東軒) 뒤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동헌이란 지방의 수령들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대청(大廳)을 말하는 것으로 넓은 의미로 관청을 가리킨다. 현재 안동예식장 일대를 말한다. 옛날 이 마을 앞에는 안동의 관아가 있었으며 이 관아 안에 있는 수령의 관사에는 안동의 부신목(府神木)이 있어서 안동부사가 동제를 지냈다고 하며 현재 안동관아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 응굴골?상천(上泉)
옛날 이 마을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맑고 맛이 특유하며 이 지역을 지나는 과객(過客)이 즐겨 마시던 곳이었다. 그 연유로 이 마을을 응궁골, 상천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또 이곳의 물을 이용하여 주조(酒造)된 안동소주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는데 그것은 상천샘의 물맛이 특이했기 때문이라 한다.
http://hompy.sayclub.com/cts2611/4513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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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흥동(雲興洞)
본래 안동부 동부의 지역으로서 운흥사(雲興寺)가 있었으므로 운흥이라 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동부동에 편입되고 1931년 안동읍제 실시에 의하여 팔광정 1정목이 되었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운흥동으로 다시 고치게 되었다.

▶ 짐대거리
안동이 배의 형국(形局)이므로 돛대인 짐대를 세워 둔 거리라 하여 짐대거리라 하였으며 항상 30여 척의 배를 세워 두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이 부근에서 정월 보름에는 안동 특유의 동채싸움이 열렸다. 동서부가 대결하는 동채싸움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인데 선조(宣祖)께서 장려한 후부터는 더욱 치열해 졌다고 한다. 그때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성씨와 혈족으로 단결되었으며 승부에 큰 관심을 보여 인근의 많은 구경군이 모여 손이 땀을 쥐며 관전하기도 하였다. 어린이들이 하는 째끼동채는 정월 내내 계속되었다. 그 외에도 서당놀이, 놋다리밟기 등의 민속놀이가 성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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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문거리?동문
본래 안동부의 동부지역으로서 안동성(安東城)의 동문 부근에 있었으므로 동문거리 또는 동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동부동에 편입되었고 1931?? 4월 1일 안동읍제 실시에 의하여 본정(本町) 1정목(町目)으로 되었다. 그 후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동문동으로 고쳤다.

▶ 동문밖[東門外里]
안동부 동문 밖에 있었던 마을이며 당시에는 주로 안동김씨, 고성이씨, 연안이씨(延安李氏) 등이 밀집하여 살았다고 한다.

▶ 동문안[東門內里]
안동부 동문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문안이라고 하였으며 그 당시에는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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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문거리?남문가(南門街)
본래 안동부의 지역으로서 안동부성(安東府城)의 남문 부근에 있었다고 하여 남문거리 또는 남문가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여기를 지나서 대구로 가는 도로가 있었고 남문 앞에는 집때거리라는 큰 돛대가 세워져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없어졌다. 현재 국민은행이 있는 곳이다.

▶ 사뭇들
원래 넓은 들과 늪이 있는 곳을 사뭇들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 마을 앞에도 넓은 들과 늪이 있었다고 ?臼? 붙여진 명칭이다. 남문거리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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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문거리?남부동(南部洞)

안동부의 남쪽에 있었다고 해서 남문거리하고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 실시에 따라 동부동의 일부를 잘라서

남문정(南門町) 1정목이라 하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남부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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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문거리?남부동(南部洞)

안동부의 남쪽에 있었다고 해서 남문거리하고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 실시에 따라 동부동의 일부를 잘라서

남문정(南門町) 1정목이라 하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남부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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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둑?조산(造山)
이 마을에 천리천이라는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이 하천의 둑에 회나무가 3그루 있었는데 수백 년 묵은 고목이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없어졌다. 회나무를 심었던 곳이라 하여 조산, 나무둑이라 한다.

▶ 사장터?사장뚝?사장(射場)
구한말(舊韓末)시대 관가에서 관리들이 궁술(弓術)을 연마하는 넓은 늪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제방을 막았기에 사장뚝 혹은 사장이라 말한다. 또 여기에 인가가 드물고 논밭이거나 늪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 말엽 낙동강 제방을 더욱 튼튼하게 쌓은 이후에는 강이 범람하여도 물이 고이지 않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낙동강이 자주 넘쳤고 서문뚝 또는 사장이라 하여 여기저기에 둑이 있었다. 사장뚝도 이러한 것의 하나로서 죄인을 사형하는 사장(死場)이 있던 곳이라서 붙여진 명칭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곳은 한말(韓末)의 군대 연병장으로 이름났던 곳이다. 사장뚝의 서쪽으로 가면 죄인을 가두어 두는 옥이 있었고, 그 곳을 지나면 인가가 드물었으니 옛날의 안동 시가지의 크기는 대체로 짐작이 간다.

▶ 샘결?샘마을?천리(泉里)
옛날에 큰 샘이 있었으므로 샘결 또는 샘마을, 천리라고 불렀다. 안동시의 하수가 이곳으로 흘러 장마철이면 침수되어 쓸모가 없는 곳이어서 이곳을 메워 지금은 주택가를 이루고 있으나 낙동강 수위가 높아지면 침수의 염려가 있었다.
이 마을에는 샘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임진왜란 당시로 거슬로 올라가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권율(權慄) 장군의 휘하에서 전령(戰令)으로 있던 권명수(權命水)란 사람이 안동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목이 몹시 말라서 샘물을 찾던 차에 작은 길가에 있는 맑은 샘물을 발견하였다. 엎드려 샘물을 마음껏 들이킨 다음에 머리를 들면서 앞쪽에 보이는 영남산을 바라보니 여자의 둔부와 같은 모양의 봉우리가 정면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를 본 권명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 마을은 물이 마르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그 샘은 천지(泉池)라 하였고, 마을 이름도 천리동이라 일컫게 되었다. 그는 이 마을에 물이 마르지 않으리라는 길한 예언을 하는 한편, 영남산의 봉우리 모양이 여자의 둔부와 같이 생겼으므로, 장차 이곳의 부녀들이 정숙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도 함께 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 방지책을 물었더니 3일간을 머물면서 궁리한 끝에 그 방지책을 가르쳐 주었다. 부정한 정기(精氣)가 감도는 이 지역에 촛대봉만 남기고 다른 샘이나 웅덩이는 모두 메우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을 부녀들의 탈선을 막는 길이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권명수가 길을 떠난 후에 이 마을의 웅덩이와 샘물이 날이 갈수록 메워져서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지켜보았더니 한밤중에 남자들이 여자들 몰래 돌과 모래로 웅덩이와 샘을 메우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천리샘을 제외한 다른 샘은 모두 메워져 버렸다. 그 이후 천리동에는 현모양처(賢母良妻)만 출생하여 이 마을 부녀들의 어질고 정숙한 행실이 이웃 마을까지 두루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을 전해들은 이웃 마을의 유수(有數)한 가문에서 이 마을 규수들과 혼인을 하고자 하는 이가 계속 늘어났다. 그래서 어느 날이고 매파(媒婆)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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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무탕?개변늪?갱변늪

안동시 사장뚝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안흥동의 터로서 넓이가 10마지기 정도가 된다.

모래 천방이 터져서 물이 넘어 늪이 생긴 마을이라 하여

구무탕 또는 개변늪 갱변늪이라고 하였다.

안흥동의 유일한 자연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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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석골거리?대석동(大石洞)

이 마을은 현재 안동여고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법상사가 있었던 골짜기 입구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법석골거리라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원래 법상동(法尙洞)에 포함되어 있었다.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 실시에 의하여
법상동을 5정목을 나누었는데, 그 중 2정목에 해당되는 구역이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지금의 대석동이 되었다.

대석동이라는 명칭은 마을 안에 지름이 3m 정도 되는 반석(盤石)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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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거리?옥리(獄里?玉里)
이 마을에 안동부의 옥(獄)이 있었다고 하여 옥거리 또는 옥리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옥동(玉洞)에 편입되고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安東邑制) 실시에 의하여 옥동 일부를 잘라서 팔광정 4정목(町目)이 되었다가 1947년 옥야동에 편입되었다. 옥야동의 원마을이다.

▶ 새장터?신시장(新市場)
옥야동에 있는 시장 마을로 광복 직전까지 현 시장 남단에 동서를 가로지른 경북선(慶北線)이 뻗었으나 경북선이 예천에서 영주로 연결됨으로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시장은 서부동에도 있으나 1946년 이곳에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였다고 붙여진 명칭이다.

▶ 진터?진장촌
진터는 옥터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안동진의 군사를 훈련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또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 학교마?학교동(學敎洞)
이 마을은 1942년까지는 과수원과 뽕나무밭 등으로 넓은 들을 이루고 있었으며 곳곳에 민가가 산재하여 있었다고 한다. 1942년부터 1974년까지 안동여자중?고등학교가 이곳에 있다가 옮겨지고 1974년부터 그 자리에 안동영호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그 때부터 학교마라 부르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수목이 우거져 있어 신시장 주변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 옥안마?옥내리(玉內里)
이 마을은 옛날 안동부의 옥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명칭이 유래되었다. 현재는 크고 작은 점포가 즐비해 있고 한길 가장자리 대부분이 노점상인들이 운집하여 신시장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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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븐돌?광석(廣石)
마을 안에 넓은 돌이 있었다 하여 너븐돌 또는 광석이라 하였다. 1895년 지방관제(地方官制) 실시에 의하여 부내면 옥리(玉里)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31년 안동읍제 실시에 따라 법상정(法尙町) 4정목(町目)이 되었다가 1947년 광석동으로 변경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이 광석동의 원마을이다.

▶ 진담믙?진담거리
안동시에서 영주방면과 예천방면으로 가는 국도변 부근에 위치한다. 현재 경안고등학교 사거리 부근이다. 이 마을에 100m가 넘는 긴 담으로 둘러싸인 집이 있었다 하여 진담믙 또는 진담거리라 불렀으나 그 집은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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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안마?당북(堂北)
안동부의 옥이 있었던 안마을이라 하여 옥안마라 불렀다고 한다.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의해 당북동이라고 하였다. 법룡사(法龍寺)의 법당(法堂) 뒤에 당집이 있었는데 그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당북동의 원마을로 법정동의 명칭도 여기서 따 온 것이다.

▶ 한절앞
한절 즉 큰 사찰인 법룡사(法龍寺) 앞에 있다고 하여 한절앞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절만 있었으나 그 후에 민가가 생겨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 복주여자중학교에서 안동우체국 쪽으로 내려오는 그 일대이다.

▶ 남천면(南川面)
이 마을은 두 개의 작은 하천이 합쳐져서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지점에 있다. 당북동 남쪽 안동 철교가 지나는 곳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 안동경찰서에서 낙동강 쪽 동부교회가 있는 부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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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석골?법석곡(法石谷)
법석골은 안동부 서부지역으로서 통일 신라 시대에 법상사(法尙寺)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安東邑制) 실시에 의하여 5구역 즉, 법상정(法尙町) 1?2?3?4?5정목으로 구분되었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1?2?4?5정목은 각각 화성?대석?광석?금곡동으로 갈라져 나가고 3정목이 법상동으로 되었다. 그 후 1964년 3월 14일 동기구(洞機構) 개편에 의하여 금곡동을 합하여 법상동이라 하였다. 현재는 안동여중과 안동여고가 마을 뒷산에 있으며 마을 가운데에는 금남로라는 도로가 나 있어 평화동, 태화동에서 안막동, 명륜동으로 쉽게 갈 수 있다.

▶ 논 골
현 안동여중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광복 전까지는 254평의 천수답(天水沓)이었다고 한다. 1949년 이후 모두 집을 지어 지금은 논이 있었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으나 그 논이 있었던 관계로 논골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법상동의 지명유래

▶ 법석골?법석곡(法石谷)
법석골은 안동부 서부지역으로서 통일 신라 시대에 법상사(法尙寺)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安東邑制) 실시에 의하여 5구역 즉, 법상정(法尙町) 1?2?3?4?5정목으로 구분되었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1?2?4?5정목은 각각 화성?대석?광석?금곡동으로 갈라져 나가고 3정목이 법상동으로 되었다. 그 후 1964년 3월 14일 동기구(洞機構) 개편에 의하여 금곡동을 합하여 법상동이라 하였다. 현재는 안동여중과 안동여고가 마을 뒷산에 있으며 마을 가운데에는 금남로라는 도로가 나 있어 평화동, 태화동에서 안막동, 명륜동으로 쉽게 갈 수 있다.

▶ 논 골
현 안동여중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광복 전까지는 254평의 천수답(天水沓)이었다고 한다. 1949년 이후 모두 집을 지어 지금은 논이 있었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으나 그 논이 있었던 관계로 논골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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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실?왕곡?금곡(金谷)?금시동(金是洞)
이 마을은 본래 안동부의 서부지역으로서 세실 또는 왕곡, 금시동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고종 22년(1885)에 권영준(權寧準) 선생이 금곡서당(金谷書堂)을 짓고 후진을 양성한데서 금곡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법상동에 편입되고 1931년 읍제(邑制) 실시에 의하여 법상정 5정목으로 되었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금곡동으로 고쳤다.

▶ 서당골?서당곡(書堂谷)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안동에 동부와 서부 두 곳에 서당을 세웠는데 서부에는 현 성소병원 뒷편 언덕에 안동권씨 추밀파(樞密派)의 권영준 선생이 금곡서당을 세우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서당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서당골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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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지?서겅지
옛날 서경이라는 들에 못이 있어서 서경지라고 한다. 여기에 서정(西亭)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하며 안동부에서 귀빈을 마중하는 오리정(五里亭)을 짓고, 그 앞에 장승을 세워 귀빈을 맞는 장소라는 표시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은 영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 고나무골
옛날 안동 지방에서는 천리천을 중심으로 해서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진 백성들이 줄다리기를 하였다. 여기에서 이긴 편은 관청에서 1년 동안 부역을 면해주었다고 한다. 평화동에서 운안동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줄다리기 때의 암줄과 숫줄 사이에 끼우는 고나무가 많이 나는 골이라 하여 고나무골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 거랑터?걸터
평화동 172번지 일대의 마을인데 전에는 이곳이 거랑이었는데 안동시가 발전됨에 따라 하천을 정리하여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명칭은 거랑이 있었던 터라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 관사마?철도관사(鐵道官舍)
평화동 남동지역이며 일제강점기 때 안동철도국(安東鐵道國) 관사가 여기에 생기면서 연유된 이름이며 이곳은 죄인을 처형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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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골?안기역마?안기동(安奇洞)
안기동은 원래 안동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 안기역(安奇驛)이 있었다고 하여 안기역마 혹은 안기골이라 하였다. 1964년 3월 20일 동기구 개편에 따라 안기동이 되었다.

▶ 서당골?감나무골?서당곡(書堂谷)
조선시대에 서당이 있어서 불리어진 이름이며 한편 옛날에 감나무가 많이 있어서 감나무골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영남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으며 입구에는 안기동사무소가 있다.

▶ 석수암(石水庵)
이 마을은 영주방면으로 가는 국도변의 화백산 기슭에 있다. 마을에 돌이 많았으며 목욕할 수 있는 맑은 물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또 이 마을에 석수암이라는 절이 있어서 붙인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소백당곡(小白堂谷):소백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가 눈 위에 옷을 벗고 누워 있는 아기가 있어 그 아기를 업고 집으로 오는 길에 이 골에 다다 르자 그 업힌 아기가 내려 달라고 하기에 내려 주니 그 아이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 다. 그리하여 여기에 당을 짓고 소백당이라 하면서 그 아이를 가신(家神)으로 모셨다 한다.

▶ 새절골?새작골
옛날에 큰 사찰이 있었다고 하여 새절골이라 하였다. 서악사에서 새절골까지 절이 많이 있어서 비오는 날도 처마 밑으로 가면 비를 맞지 않고 갈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칠성동(七姓洞)
마을 명칭이 생긴지는 20여 년 미만이다. 이 골에 처음 4가구가 살았는데 세 들어 사는 집까지 합하여 7가구가 살았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성씨(姓氏)가 각기이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회나무골?횟골
마을에 큰 회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유래된 명칭이다. 이 마을은 목골과 칠성동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 가골?가학곡(駕鶴谷)
마을 뒷산이 가학(駕鶴)의 모양이라는 데서 연유되었으며 현재 안기동의 중심 부분이고 소백당골과 접해 있다.

▶ 마지락골?마지막골
골짜기 맨 끝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서 마지락골 또는 마지막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 돌트밋골
목골 뒤쪽에 있는 마을로 돌더미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목골?못골
1939년 경 골짜기 입구에 못을 막아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에는 격전장이었고 1951년에 못이 터져 지금은 못둑만 남아 있다.
◇ 두트바웃골:큰 바위가 있어 유래되었다고 하며 목골 건너편에 위치한다.
◇ 아래기골?아래골:마지락골 북쪽 목골 아래쪽에 길게 위치한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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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거리?간척골
안기동과 운안동 경계지점으로 공민왕의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 감옥이 있어 관청 사람이 많이 왕래하였다고 붙여진 명칭이다.

▶ 새골?샛골?봉곡(鳳谷)
관거리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부터 경치가 아름답고 새가 많은 곳으로 이름이 나서 붙여진 명칭이다. 또 여기에 찰방(察訪)의 관사도 있었다고 한다.

▶ 분지골?빗집골?짓골
새골과 인접하며 골짜기 입구에 효자각(孝子閣)이 있었는데 이것을 빗집이라 부르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분지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분지라고도 부른다.

▶ 마무골?마모골?마고동(麻姑洞)
옛날 마고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에 유래되어 마모골이라 한다. 운안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 마고동천(麻姑洞天):운안동 마을 뒤 산기슭 언덕에 높다란 절벽이 있으며 30~40년 전만 해도 그 일대에는 솔숲이 울창하고 골짜기를 흘러 내린 맑은 냇물이 폭포를 이루었으며 아 름다운 천석(泉石)이 절경을 이루었다 한다. 옛날에 마고선녀(麻姑仙女)가 내려와 이곳 폭 포 아래서 목욕을 했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 무덤렛골?무덤티골
이 마을은 열리재 서쪽 골짜기에 있다. 마을에 장군의 무덤티가 있었다고 하여 유래된 명칭이다.

▶ 스피절?신피사(神皮寺)
이 마을에 신피사(神皮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유래된 명칭이다. 분지골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 응달골?음달골?음지골
빗집골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이 골짜기는 하루 종일 그늘진 마을이기 때문에 응달골 혹은 음지골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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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르내?이천(泥川)?도천(陶川)
원래 안동부 부내?湧? 지역으로 왕달봉에서 발원한 하천이 남서쪽으로 흘러 마을 앞을 가로지르고 꺾어서 북서쪽으로 흐른다고 하여 지르내라 하였다. 하천 윗쪽을 웃지르내, 아랫쪽을 아랫지르내라 한다. 또 이 마을에는 진흙이 많고 그 질이 좋아서 도기(陶器)를 만들었다고 하여 도천이라 하다가 이천으로 변경되었다고도 한다.

▶ 지비골?제비원?연미원(燕尾院)
조선시대에 출장가는 관리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연미원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또 미륵당(彌勒堂)의 미륵을 덮는 난간 집이 있었는데 도대목(都大木)이 한절-법룡사(法龍寺)-을 짓고 그 제자가 이 난간 집을 지었다 한다. 도대목이 한 절을 다 짓고 오니 아직까지 그 제자는 평고자(平高子)를 박고 있었다. 화가 난 도대목이 난간 집을 차 버렸더니 그 제자는 떨어지면서 제비가 되어 날아가서 제비원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난간 집이 무너질 때 그 소리는 30리까지 울렸다고 한다. 이여송(李如松)이 이 앞을 지날 때 말발굽이 떨어지지 않아 그 까닭을 알아보니 미륵불이 있어 그렇다고 해서 미륵불에 올라가 단칼에 목을 쳤다. 그 때 미륵의 목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고 하며 그 피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 이천동 석불상:안동시에서 영주방면으로 6㎞ 정도 국도를 따라 가면 오른편에 커다란 불상 이 있다. 이것이 이천동 석불상이다. 그리고 이 일대를 제비원이라고 하는데 이 제비원에는 연(燕)이 처녀에 얽힌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신라시대에 이곳에는 여관(당시에는 원(院)이 라 했다)이 하나 있었다. 이 여관에 일찍 부모를 여윈 연이라는 예쁜 처녀가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연이는 인물이 예쁘고 마음이 고운데다가 항상 지나는 길손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시중을 들었다. 방에 불도 넣어 주고 밥도 후히 담아 주었으며, 빨래까지 빨아 주는 연이는 밤이 늦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곧바로 자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글을 익히고 염불을 외웠다. 그 알뜰한 정성과 고운 마음씨는 모든 사람들을 감격하게 했고 그 때문에 이웃 마을 총각들도 모두 남모르게 연이를 사모하였다. 그런데 이 원의 이웃 마을 에 김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성미여서 동냥온 거지를 내쫓는 그 런 위인이었다. 그런 인심 고약한 김부자의 아들도 은근히 연이에게 장가들고 싶었다. 그러 나 이 총각이 어찌하다가 비명에 죽어 저승에 가게 되었다. 김부자 총각의 인사를 받은 염라 대왕은 한참을 기웃거리며 명부를 뒤적이다가 겨우 이름을 찾아서는 능글맞게 '아니! 자네 는 아직 올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왔지? 이왕 왔으니 인정이나 좀 쓰고 갈 마음이 없느 냐?'고 물었다. 이에 총각은 '지금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염라 대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웃으며 총각을 다시 불렀다. '총각! 자네는 세상에 적악(績惡)한 사람이라 다음에는 소로 환생할 것이다. 자네의 창고는 텅 비어 있지만 자네가 사는 건너 마을의 원에 살고 있는 연이는 착한 일을 많이 하여 창고에 많은 재물이 쌓여 있다. 그걸 좀 꾸어 인정을 쓰고 가렸다.' 이 말에 총각은 크게 놀랐지만, 다시 살아서 돌아간다는 욕심으로 연이의 재물을 꾸어 쓰고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세상에 돌아온 총각은 즉시 연이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자기의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연 이는 그 재물을 모두 부처님을 위해 쓰리라 마음먹고 비바람에 시달리어 바래진 석불을 도 선국사로 하여금 다듬게 하고 그 석불을 중심으로 큰 법당을 짓도록 했는데 이 공사가 5년 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법당이 완성되던 마지막날 기와를 덮던 와공(瓦工)
이 잘못하여 그만 높은 지붕으로부터 떨어져서 그 몸뚱이가 마치 기왓장이 깨진 것처럼 조각이 나 죽고, 그의 혼은 제비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고 한다. 이에 이 절은 연비사(燕飛寺) 또는 연미사 (燕尾寺)라 부르고 이곳을 제비원 또는 연비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연이는 그 나이 서른 여덟이 되던 해 동짇달 스무 사흗날에 처녀의 몸으로 죽게 되었다. 그 처녀가 죽던 날 은 온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큰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지금의 돌부처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돌부처를 연이의 넋이 변하여 생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제비원은 성주풀이의 본향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안동시가지
 

▶ 두르골?두우티?두우치?두우현동(斗牛峴洞)
두우티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주로 안동권씨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 두우티:두우티 마을 위쪽에 있는 고개이다. 지형이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밋두르 서쪽에 해당된다.

▶ 밋두리?미두루?며두동
한티재 남쪽 밑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이곳에서 콩과 팥을 많이 재배하였다고 해서 며두동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 울바위골:밋두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곳에 두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제비원 미륵불을 만들 때 다른 한 바위가 먼저 가서 미륵으로 만들어지자 남은 한 바위가 원통해 울었다고 하 여 붙여진 명칭이다.

▶ 양이골?양의곡(良義谷)
왕달봉 밑에 있는 마을로 지방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봉화대를 통하여 임금님께 소상히 알리는 어진 백성이 살고 있다 하여 양의골이라 하였다. 두 개의 작은 마을이 있는데 골짜기 남쪽 양지 쪽에 있는 것을 양지마을, 음지 쪽에 있는 것을 음지마을이라 한다.
◇ 왕달봉:조선시대에 봉화대가 있었던 높은 산이다.
◇ 왯 골:양이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기와를 많이 구웠다고 한다.

▶ 용달골?용당곡(龍堂谷)
범당골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송천(二松川)에 최씨와 김씨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가축을 산짐승한테 많이 잃어 마주 보이는 산에 당(堂)을 지어서 제사(祭祀)를 지냈더니 그런 일이 없어졌다 한다. 이 일이 있은 이후부터 이곳을 용당골이라 한다.
◇ 범당골:용달골 앞산에 있는 골짜기이다. 범당이라는 당집이 있어서 붙인 명칭이다. 현재도 매년 동제를 지낸다. 또 안동의 강신무들이 내림굿을 자주 하기도 한다.

▶ 매락골?매화곡(梅花谷)
송현동 몰갯골에서 북동쪽으로 조그마한 고개를 넘으면 매화골이 자리잡고 있다. 옛날에는 이 마을에 매화나무가 많아서 매화골이라 이름지어졌다 하는데 지금은 매화나무를 찾아 볼 수 없다. 매화골을 매락골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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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막골, 안막곡(安幕谷)
이 마을은 안막동의 원마을으로서 원래 안동부의 서부지역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 현 길원여고(吉原女高) 자리에 순흥(順興) 안효자(安孝子)의 대묘막(大墓幕)이 있었기 때문에 안막골이라 불렀다. 이 안막골은 1914년 며질리와 병합하여 안막동(安幕洞)이 되었다가 1931년 안막정(安幕町), 명륜1정(明倫一町), 명륜2정(明倫二町)으로 분리되었다. 그 뒤 명륜1정은 명륜동, 명륜2정은 신안동이 되고 안막정은 안막동이 되었으며 이때에 상아동을 독립시켰다. 그러니까 원래의 안막동은 현재의 명륜동, 신안동, 상아동이 다 포함된다.

▶ 얼근방우, 쿵쿵바우, 킁킁바우, 굼바우골
현재 길원여고 아래 쪽에 있었던 바위로 얼금얼금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얼근방우라고 부르기도 하고 얼근방우 아랫부분에 약수가 솟아 폭포를 이루어 쿵쿵 킁킁 한다고 해서 쿵쿵바우, 킁킁바우라고도 한다. 그 바위가 있었던 부근의 마을을 얼근방우라고 한다.

▶ 세명당?사명당골?사명당곡(四溟堂谷)
사명당(四溟堂)이 머물렀다는 말이 연유되어 부르게 된 이름이며 사명당에서 그 음이 변하여 사명당골 혹은 세명당으로 불리어졌다 한다.

▶ 등애골?도화곡(桃花谷)
옛날 이곳 계곡에는 복숭아 나무가 많아 꽃이 만발했다가 질 때 낙화가 골에 가득했다 해서 도화곡(桃花谷)이라 칭했으나 그 음이 변하여 등애곡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 머지리?며질리?원지(遠地)?원촌(遠村)
고려말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이 피신하여 머물렀다 해서 불리어진 이름으로 머지리 혹은 며질리라고 부른다. 또 일설에는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여러 개의 골로 이루어져 세상이 시끄러울 때 은거하기에 알맞는 피난지로서 이 곳에 은거하는 이에게 어디 있느냐? 고 물으면 '그저 먼 곳에 있다'고 대답하므로 먼 곳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원지, 원촌, 머질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마을은 약 150년 전 안동권씨 판관공(判官公)의 후예인 권동규(權東奎)라는 선비가 은거지로 정하고 그의 호(號)를 따서 몽은서당(蒙隱書堂)을 열었으므로 사방에서 학동들이 모여 글을 배웠다. 그 중에는 대성(大成)한 이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의 후손들도 대를 이어 훈장 노릇함을 즐겨했으며 특히 고종(高宗) 임금의 어린 시절에 글을 가르친 스승도 이 마을에서 나신 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에는 지금도 안동권씨의 재실이 있으며 그 후손들이 여러 집 살고 있다.

▶ 놋감애골?노가므골, 원무덤골:머지골 안에 있는 골짜기이다.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에 훌륭한 고을 원님이 있어서 늘 고을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돌아보며 불편함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한편 한 사람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사는 일이 없도록 각별한 배려를 하는 것이었다. 송사(訟事)가 있을 경우에는 항상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송사를 해결하고, 권세나 재물의 힘으로 약한 백성들을 착취하거나 억누르는 일이 없도록 했다. 원님이 선정(善政)을 펴니, 고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원님을 따르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원님이 갑자기 병이 걸려서 위독하게 되자 고을 사람들은 모두 원님의 완쾌를 빌었지만 기도의 보람도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원님의 죽음으로 고을 사람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원님 장례일에는 모두들 조객(弔客)으로 모여들었고, 상두군으로 자청해서 나섰다. 상여가 나가자 뒤를 따르는 조객들은 길을 메웠다. 상주는 고인의 뜻을 받들어 조객으로 장지까지 따라 온 사람들과 상두군에게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놋쇠로 된 큰 가마솥을 구해 오도록 하고, 그 솥에다 밥을 짓게 하였다. 놋가마솥이 워낙 컸기 때문에 조객들과 상두군의 점심 대접을 넉넉히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연유하여 그 원님의 무덤이 마련된 이 골을 원무덤골, 또 그 큰 놋가마로 조객과 상두군을 대접했던 골이라고 놋가마 즉 노가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범석골?범소골?호소골?호소곡(虎嘯谷)
이 마을에 숲이 우거져 호랑이가 운다고 해서 호소골이라 칭했다. 그 호소골이 범소골로 되고 다시 범석골로 변전(變轉)되면서 불리어지게 되었다. 또한 이곳의 지형이 호두형(虎頭形)이라 해서 범소골로 불리어지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예장티골
이 마을의 명칭은 처녀로서 어린아이를 낳다 죽은 예기(藝妓)의 귀신을 동리에서 내쫓기 위해 당(堂)을 세웠으며 1년에 한 번씩 미역국을 끓여 제사를 지내 주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정베기?정백(井伯)
이 마을의 논 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석수장이들이 정으로 돌을 깨기 위해 구멍을 뚫다가 3개째에 정이 박혀 빼낼 수 없었다 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정베기, 정백으로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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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동은 서후면과 경계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원래 안동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마당재 들에 백로(白鷺)가 내렸다 해서 백로하전(白鷺下田)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어 노하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봉동과 서후면의 경광동, 서선면의 막곡동을 병합하여 노하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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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낫골
안노하골을 말하며 낫 모양으로 생긴 골이라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안낫골은 낫골의 안쪽 마을을 일컬으며 30여 가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 밧낫골
낫골의 바깥 마을을 말한다. 노하리의 동쪽에 위치하며 과거에는 밭이 많았다 하나 지금은 논이 더 많다. 구 경북선이 골짜기의 중앙부를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 저봉골?재봉골?제봉동(啼鳳洞)
고을 어귀의 왼쪽 산봉우리가 매같이 생겼다고 하여 매봉이라 불렀으며 또 이 봉우리에 봉(鳳)이 울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진양하씨가 일찍부터 살아 왔다.

▶ 양지마
재봉골과 고등골 사이에 위치하며 늘 햇빛이 비치는 마을이라서 양지마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 고등골?직곡(直谷)
노하리 북동쪽에 위치하며 산등이 곧고 또한 골짜기가 곧아 고등골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 수류골?수리골?수륵골
재봉골 북동쪽에 위치하며 금재 냇물과 예고개 물이 합수되어 골 어귀를 돌아 흐른다고 하여 수리골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50여 년 전에 마을이 있다가 없어진 후 다시 사람이 거주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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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뫼?솔걸?송걸
반변천 안쪽에 시냇물이 있고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많아서 솔뫼, 솔걸, 송걸이라 한다. 1984년 행정 구역 변경으로 임하면에서 안동시에 편입되었다. 현재 안동대학교가 마을 동쪽에 들어서 있어서 대학촌으로 변하였다.

▶ 논골?답곡(沓谷)?양전(羊田)?송동(松洞)
마을 뒤에 못이 있고 논이 많은 골짜기라 하여 논골이라 불리며 또 이 마을에 양을 많이 사육하여 양전이라 하였다. 그리고 소나무가 많이 있다고 하여 송동이라고도 한다. 흥해배씨(興海裵氏), 용궁전씨(龍宮全氏)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1983년에 안동대학교가 이 마을 뒤에 자리잡고 있어 대학촌으로 변모되었다.

▶ 보나리?보나루?포진(浦津)
이 마을은 안동대학교의 동남쪽에 있다. 약 350 년 전 강릉유씨(江陵劉氏), 안동권씨, 평해황씨(平海黃氏), 흥해배씨 4성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부산에서 소금배가 들어와서 소금을 내리고 양곡을 싣고 가는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포진이라 하였다고 한다.
◇ 기 우 정:포진에 있는 우물이다. 가뭄이 심할 때 마을 내의 유지가 기우정에 음식을 차려 우물에 넣어 정성이 지극하면 음식이 없어지면서 비가 내리고 ?ㅌ봉? 부족하면 음식이 우물 밖으로 흘러나오고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은 간이상수도 집수정(集水井)으 로 사용하고 있다.

▶ 신부락
이 마을은 송천초등학교가 개교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서 신부락이라 한다.

▶ 새뫁
새뫁은 갑술년(1934) 대홍수 때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송천들 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주로 김해김씨, 진천송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 선어대(仙魚臺)?선녀대(仙女臺)
옛날 선녀(仙女)가 내려 와서 놀았다고 하여 선녀대라고 했다고 하며 그 뒤 깊은 소(沼)에 고기가 많이 있다고 하여 선어대라 했다 하기도 한다. 또 신선(神仙)이 이곳에서 고기를 낚았다고 하여 유래된 선어대란 바위가 있기 때문에 불려진 마을이라고도 한다.


                                                   선어대(仙魚臺)?선녀대(仙女臺)

▶ 원당골
솔뫼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당이 있어 원당골이라 한다. 한성부 자윤을 지낸 송서인(宋瑞 ) 선생의 재사가 있다고 한다.

▶ 천변(川邊)
이 마을은 선어대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위치가 강가에 있어서 천변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 하리(下里)?송하(松下)
1450년 경 반변천이 극심한 홍수로 인하여 물길이 지금의 반변천으로 흘렀다. 당시의 강변이 퇴적되어 농토가 조성되면서 마을로 이루어졌다. 송천동의 자연마을 중 제일 아래에 위치하였다 하여 하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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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락(嶺洛)?마지(磨芝)
조선조 숙종 때 이용우(李龍佑) 선생이 한양에서 내려와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영락이라 하였다. 그 후 이용우(李龍佑) 선생의 삼대손(三代孫) 이종협(李鍾協) 선생이 마지라 개칭하였다고 구전되고 있으며 마지락골이라고도 한다.

▶ 건지기골?건직(乾直)
이 마을은 마지락골 입구의 왼쪽 편에 위치하고 있다. 가뭄으로 인하여 농작물 수확이 거의 없고 메마르다고 하여 건직이라 불렀다고 한다.

▶ 뱃가골
낙동강의 골 어귀에 배를 정박하였다 하여 뱃가골이라 불리어지고 있으며 가뭄이 극심할 때 전 동민이 어귀에 나와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 새터?신기(新基)
이 마을은 1800년 경 서씨 성을 가진 한 농민이 조그마한 오두막집을 마련해서 신접(新接) 살림을 차렸다고하여 새터라 부르게 되었다.

◇ 원 골:옛날에 오가는 사람들이 주인 없는 무료 숙박 집으로 왕래하다가 잃어버린 물건 을 주워서 갖다 놓고 가면 나중에 주인이 찾아가는 집, 즉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말로, 고을 원이 없어도 살아 갈 수 있다는 데서 유래하여 그 집을 원이라 부르며, 그 원이 있었던 골이라 하여 원골이라 부른다.
◇ 오수리골:이 마을에 큰 바위 동굴이 있었는 그 속에 오소리들이 많이 모여서 살던 곳이라 해서 오수리골이라 한다.
◇ 도덕곡(道德谷):조선시대 퇴계(退溪) 선생(先生)의 제자 남비지 선생이 살던 곳으로 덕이 큰 선생이 살던 곳이라 해서 도덕곡이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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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무(無主無)
조선 명종 때 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마을 앞의 하천의 물이 맑고 들이 넓으며 비옥(肥沃)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강변에 넓은 늪이 있었으나 주인이 없다 하여 무주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안동군 남후면에 속하여 수하동(水下東)에 편입되었다.

▶ 엉골?어곡(魚谷)
1750년대 골짜기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면서 생긴 웅덩이에 고기가 많이 모여 물고기를 잡던 곳이라 하여 어곡(魚谷)이라 부르고 있다.

◇ 부 처 골:1720년 경 이곳에 조그마한 암자가 하나 있었으나 허물어져 없어지고 그 암자에 있던 부처만 오래도록 남아 있어서 부처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그마저 흔적이 없고 당 시의 절터에 주춧돌만 약간 남아 있다.

▶ 앙실?낙양촌(洛陽村)
약 420여 년 전 신씨들이 수십 가구 살고 있을 때 마을 앞의 강에 있는 용을 잡아먹으면 좋다는 풍문에 의하여 용을 잡으러 갔다가 용이 요술을 부려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져 마을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용이 앙심을 품은 마을이라 하여 앙실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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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들마?강정(江亭)?정촌(亭村)
안동시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정상동은 정자촌의 윗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두들마는 정상동의 자연마을이며 명칭의 유래는 강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12개의 강정(江亭) 중에서 그 위치가 중앙부에 있고 지대가 다른 정자보다 높아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현재 택지개발이 이루어져 법원과 검찰청 등이 들어서며 아파트촌이 한창 개발중이다.

▶ 거붓골?거북골?거부곡(巨夫谷)
이 마을은 거북형의 큰 바위가 마을 입구에 있었다 하여 거북골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거북바위를 찾아 볼 수 없다. 또 마을에 거북과 같은 야산이 있어서 붙인 명칭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도투마리?도투말
이 마을 지형이 돼지 머리와 같다 해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또 마을 지형이 동서는 높고 중앙이 낮아서 흡사 베짜는 베틀의 도투마리형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삼정곡(三井谷)
이 마을의 명칭은 우물 3개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데서 유래되었다 하며 이 우물들은 가뭄에도 잘 마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간혹 한 우물이 마르면 이상하게도 똑같이 마르고 물이 솟으면 솟는 양도 세 우물이 같다고 한다.

▶ 옹정골?옹정곡(瓮井谷)?옥정리(玉井里)
오래된 소나무의 큰 뿌리가 우물 속에 들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우물의 물맛이 좋고 마시면 장수(長壽)한다고 하여 이곳 주민들은 대체로 장수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 우물은 매몰되어 버렸고 간이상수도가 생겼다.

▶ 아래기?아락(阿落)
아래기는 옹정골 동쪽으로 약 300m 쯤에 위치해 있는 마을로 옛날 어떤 풍류객(風流客)이 지나다 반석(盤石)좋고 조월(釣月)의 장소가 좋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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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다리?먼달?먼다리?정하동(亭下洞)
정하동은 한말(韓末)에 건축된 주원정(注源亭)이 있는 정자 밑 동리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먼다리라고 하는 것은 낙동강이 안동부를 돌아 나가는 곳에 있는 다리 길이가 670m에 이르는 긴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 영호루(映湖樓):고려 초기에 지은 이 건물은 강 북쪽 시내편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4차 례의 홍수에 유실이 되어서 197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재건되었다. 누각 안에는 우탁(禹 卓)?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길재(吉再)?이황(李滉) 선생 등 명현들이 올라 지은 시편(詩 篇)들이 걸려 있다. 누각의 정면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한글 제액이, 북쪽에는 공민 왕의 어필(御筆) 제액이 게첨되어 영남루(嶺南樓), 광한루(廣寒樓), 촉석루(矗石樓) 등과 함 께 나라 안의 손꼽히는 명루(名樓)임을 잘 말해 주고 있다.

▶ 웃먼달
이 마을은 먼다리의 윗쪽에 자리잡고 있어 웃먼다리라고 한다. 현재 안동시민운동장과 야외수영장이 설치되어 있는 마을이다.

▶ 정자골?정자곡(亭子谷)
이 마을 안에 정자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정자골이라 하며 정자는 소실되어 볼 수 없다.
◇ 쏘근정자골:정자골 등성이인데 정자가 없는 골을 정자가 있는 골 같이 부른다고 하여 유래 된 이름이다.

▶ 신저리?신저리골?신절사?신사리(新寺里)
이 마을 뒤 고사리골에 신절사, 신사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안동시에서 안포선 강변도로를 따라 2.5㎞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 아느골?아나골?내곡(內谷)
이 마을에 왕비가 피난을 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을 뿐 고증은 할 수 없다. 신저리에서 계곡을 따라 약 1㎞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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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평리(桂坪里)
낙동강을 따라서 마을이 형성된 계평리는 안동군 서선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와평리, 상계곡리, 회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계곡리의 계(桂) 자와 와평리의 평(平) 자를 취하여 계평이라 하였다.
자연마을의 현황은 욋들, 살머리, 웃절, 엄실 마을 등 4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96가구에 285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 욋들
한자 표기로는 와평(瓦平)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사람이 마을을 개척한 후 가마를 만들어 기와를 굽던 곳이란 데서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에 와서는 욋들로 부른다. 회곡리의 아랫절과 경계를 이룬 곳으로 마을의 북서쪽에 계평못이 있어 계평들의 수원이 되고 있다.

◇ 계평들:욋들 마을 앞에 형성된 들이다. 낙동강의 흐름에 의해 형성된 퇴적지이다. 들판 위로 중앙고속도로의 풍산대교가 지나며 강 건너 낙암정(洛巖亭)과 상락대의 절경이 또렷이 보인다.

◇ 독지골:욋들 북쪽 골짜기이다. 외따로 떨어진 마을이라고 하여 독지골이라 부르며 옛날에 도둑이
출몰하기도 하여 도둑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욋들 북쪽 골짜기가 있는 마을로서, 이 마을 북쪽에는 만석곡(萬石谷)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만석꾼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독지골 못이 있다.


▶ 엄실(奄實)?엄곡(奄谷)
욋들 남동쪽에 형성된 마을로 지세는 둔덕이 지고 엄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어떤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고 나서 엄나무가 많다고 엄곡이라 하다가 엄실로 불리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부친의 시묘(侍墓)살이를 3년간 했다하여 빈소골이라고도 한다.

◇ 절 골:엄실 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절이 있었다고 절골이다.
◇ 중 골:절골 옆 골짜기로 스님들이 살았다고 중골이라 한다.
◇ 큰엄실골:엄나무가 있다고 붙인 이름이다.
◇ 바람테재:엄골 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계평리에서 막곡리로 연결되는데 바람이 항상 세게 불어서 바람테재라 부른다.

▶ 살머리
계평리를 감싸안은 산줄기가 낙동강으로 그 맥을 뻗어 엄실 동쪽 산머리를 이루었다. 이 산머리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산머리, 살머리라 한다.

▶ 웃절?상계곡(上桂谷)
살머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편에 상계사(上桂寺)라는 작은 절이 있어서 상계곡 또는 웃절이라 이름지었다. 막곡리와 경계되는 지점에 대덕사(大德寺)가 있다.

◇ 불당골:불당과 샘이 솟아올라 지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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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란리(古蘭里)

고란리는 길안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길안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영천방면의 국도를 따라 7km 정도를 가서 왼쪽에 난 작은 도로를 따라 가면 나타난다. 이 길의 입구에서 1km 정도 들어가면 마을이 있다. 마을 뒤쪽에는 계명산이 있는데 요즘 여기에 자연휴양림이 개발되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고란리는 원해 임하현의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고종 32년에 길안면으로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대사리, 미산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고란리에는 57가구에 136명이 거주하고 있다.


▶ 골안?고란(古蘭)?원고란
이 마을은 고란리의 자연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다. 국도에서 고란리로 접어드는 도로를 따라 1km 정도 들어가면 나타난다. 주위에는 높은 산으로 둘러져 있어서 분지형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은 14세기 경에 개척되었는데 입향시조는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후손이라고 한다. 보백당 선생도 한 때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 마을을 개척할 때 골짜기 안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골안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안동김씨가 주성을 이루면서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중미고개:원고란에서 아랫미천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중메고개라고도 하는데 마을과 마을
의 중간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사랫골:현재 휴양림이 있는 골짜기이다. 싸리골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싸리나무가 많이 난
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용 소:원고란에서 서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여울이다. 여울 위에 바위가 있는
데 이 바위가 용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마을에서는 가뭄이 들었을 때 용바
위를 내리치면 비가 온다고 하여 바위를 많이 쳤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용의 턱 부분이 깨어
져 나갔다고 한다.
◇ 행정골:원고란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원고란에서 모치골로 넘어가는 골짜기이다.
너븐등 입구에 해당되기도 한다.


▶ 모치골?모치곡(茅治谷)
고란리의 남쪽 골?Ⅱ藪? 위치한 마을로 원고란에서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을 개척할 때 잔디가 우거진 곳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모치곡(茅治谷)이라고 한다. 또 모치새가 많이 있다고 하여 모치골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12가구가 살고 있으며 복부공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 기장재:모치골 남쪽에 있는 고개이다. 능선이 길어서 붙인 명칭으로 예전에는 이 길을 통하
여 대사리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 고개를 제당재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모치골의 동제당이 있
기 때문이다. 현재 이곳에 모치골 주민들이 매년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 잠뱅이재:모치골에서 구수리의 잠뱅이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잠뱅이 마을로 통하는 고
개라고 하여 붙인 명칭이다.


▶ 너븐등?넓은등?광등(廣嶝)
이 마을은 원고란과 모치골 사이에 있다. 이 마을은 1965년 각처의 도시 근교 노동자들이 화전(火田)을 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이주하여 개척한 것이다. 마을 명칭은 산등(山嶝)이 넓은 곳에 위치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 주민들이 떠나고 현재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 아랫미내?하미천(下眉川)
이 마을은 원고란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금곡리(金谷里)의 미천 아래 쪽이 된다. 냇물이 눈썹처럼 반월형(半月形)으로 흐르는 모양에서 미천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금곡리 미천의 아래에 있다고 하여 하미천, 아랫미내라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하미천에는 묵계(?溪)와 송사(松仕)를 잇는 도로가 있다. 이 도로 옆에 비스듬히 돌출한 웅장한 모습의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오뉘바위라 한다.
시대를 알 수 없는 어느 옛날 이 바위 옆을 지나던 오누이가 있었다. 이들은 멀리 사는 친척집을 다니러 집을 나섰는데 이곳을 지날 때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천둥번개와 함께 소낙비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워낙 세차게 내리는 소낙비여서 앞뒤를 분간 할 수 없는데 다가 인가도 없는 외딴 산골이라 오누이는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는 산비탈의 바위굴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비는 멈추지 않고 날은 어두워져서 오누이는 바위굴 속에서 옷이 젖은 채로 웅크리고 앉아 밤을 새우게 되었는데 두려움과 추위로 떨다가 그만 이성을 잃고 불륜을 저지르려는 그 순간 하늘이 노했는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위굴의 천장이 무너져 내려앉으면서 큰 바윗덩어리가 오누이를 덮쳐 그들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뒤로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오뉘바위라 불렀다고 전하며 오뉘바위에는 한쪽이 무너져 내려앉은 듯한 흔적이 남아 있고 큰 바윗덩어리에는 핏자국이 얼룩져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곳 사람들은 오뉘바위를 '신명(神明)이 지켜준 천륜(天倫)의 성역(聖域)'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 장수궁디바우:오뉘바우가 있었던 자리에서 건너편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가 움푹들어 갔는
데 이것은 장수가 엉덩이를 박았다고 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명칭이 유
래한다. 또 이것을 쌀개바우라고도 하는데 바위의 모양이 방아의 쌀개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
여졌다.
◇ 미천들:미내 앞에 있는 넓은 들판으로 미내들이라고도 한다. 이 들판에는 약수터가 있었는데
길안천에 보가 설치되어 없어졌다.
진모래


견훤은 원래 지렁이의 화신이었다고 한다.

전시에는 모래땅에 진을 쳐서 신변이 위태롭게 되면 지렁이로 변해 모랫속으로 들어가버려 웬만해선 그를 물리칠 수 없었다고 한다.

삼태사가 왕건 을 도와 현재의 안동시 와룡면 서지동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견훤이 그 동쪽 낙동강변 모랫땅에 진을 쳐 대전하였다.

싸움이 수십번 계속 되었는데도 끝이 나지 않고 견훤은 싸움을 하다 불리 해지면 모랫속으로 기어들어가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삼태사들은 전략을 세워 흐르는 강을 막아 못을 만들고 못속에 소금을 수없이 넣어 염수를 만들어 놓고 접전했다.

그 어느때 보 다 치열한 싸움이었다.

견훤은 점점 불리해지자 당황하여 지렁이로 둔갑하더니 모래속으로 기어 들었다. 삼태사는 이때다 하며 염수의 못물을 터트렸다.

소금물이 흘러 내리니 아무리 둔갑한 지렁이 일지라도 견딜 재주가 없었다. 견훤은 겨우 목숨만 건져 패주하여 안동땅에서 물러났다 고 한다

. 지금도 이 내를 소금물이 흘렀다하여 "간수내"(서지동에 있는 마을로 음이 변해 "가수 내"로 불리운다)라 부르고 견훤이 숨었던 모래를 "진모래"라 한다.

이 진모래의 넓은 모래벌은 지금 안동댐에 의해 수몰되어 있으며 삼태사를 모신 사당이 현재 안동시내에 있다.

 


 

 

 


  

 

 

 

 

 

 

 

 
출처 : 안동와룡산 문화와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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