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변에 매화가 만개할 무렵, 지리산 자락에선 산수유가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린다. 구례의 봄은 그렇게
활짝 핀다. 전국 산수유 생산량 70%를 책임지는 구례에서도 산동면, 그 산동면에서도 산수유 군락으로
이름이 높은 땅이 해발 480m에 위치한 상위마을이다. 산수유나무 2만 7천여 그루가 빽빽하다. 저절로
자라기도 했고 사람 손이 닿기도 했다. 산수유나무에 푹 파묻힌 마을 군데군데 고로쇠나무가 처량할
지경이다
"산수유꽃 피니 봄이지." 상위마을에서 나고 자란 구형근 어르신 말이다. 꽃은 10일께 폈다. 지난달까지는 꽃망울이 온기와
냉기에 벌렸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앞으로 20일, 내달 중순까지 꽃 천지다. 그 후엔 노란 가루를 땅에 흩뿌려 소리 소문없이
문득 제 봄을 마감한다. 매화의 절정이 낙화라지만 산수유꽃은 그렇지 못하다. 산수유나무는 꽃 져 여름이고 열매가 발그레
익어야 가을이다. 마을의 가을은 벌겋게 달뜬다. 그때는 열매 체험축제로 또 한 차례 동네가 들썩인다
산수유나무를 일러 대학나무라 한다. 세 그루만 있어도 자식을 대학 보낼 정도로 돈이 됐다. 늦가을 수확한 열매는 강정제나
강장제로 쓰인다. 이런 상위마을은 땅도 비옥해 가난하지 않았다. 한때 130여 가구가 도란도란 살았다. "이젠 채 30가구가
안돼." "사람들이 기름진 고향을 왜 떠났죠?" "그 있잖은가, 여순사건…." 무심코 던진 질문에 어르신이 목소리를 낮췄다.
지리산 자락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묻지 말라 했다. 금기를 떠올렸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