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와 홍보/경주 문화재

사적지의 만추

금강석1 2012. 10. 31. 23:27

2012년도 날로 깊어지는 10월30일의 사적지 가을의 풍경을 담으러 계림, 귀래정, 내물왕릉, 양동마을, 옥산서원,

유연정, 정혜사지13층석탑을 돌아 보았는데 아직까지 은행나무잎은 새파랗고 양동마을의 가을도 깊어지지를

않았네 앞으로 10여일이 지난후에나 유연정의 은행나무가 놀하게 물들어 질려는지 기다려진다

 

 계림은 첨성대와 반월성 사이에 위치하여 있으며 신라왕성인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강전설과 관계 있으며 숲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계림이라 불인다

삼국유사를 보면 60년(탈해왕4년) 8월4일 밤에 호공이 반월성 서쪽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옆의 시림이 온통 환환  광명으로 차 있었다

자주빛 구름이 하늘에서 그 숲속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 구름속으로는 황금으로 된 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숲 속을 밝히는 그 광명은 황금궤에서 번져 나오고 있었으며 나무 아래에는 흰 닭 한마리가 울고 있었다  호공은 궁궐로 달려가서 이 광경을

탈해왕에게 고하자 왕은 시림으로 행차하여 궤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한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 났다 이 아이를 "알지"라 하니 우리

말로 "아기"를 뜻하는것이다

 

 탈해왕이 알지를 안고 궁으로 귀환하는데 새와 짐슫들이 춤을 추며 기뻐하였다 왕이 알지를 태자로 삼으니 후일 왕위를 파사왕에게 양보

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알지는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김으로 하였다 그 후 그는 열한을 낳고 열한은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낳고 수류는 욱부를 낳고

욱부는 구도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는데 미추는 김씨로서는 최초로 왕웨에 올라 신라 13대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하늘에서 자주빛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거나 알 대신에 금궤가 등장한것 등을 보면 계림의 김ㅇ라지 신화는 천손강림의 설화이자

난생설화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김알지 탄생일은 65년(탈애왕9)으로 되어있고 내용도 삼국유사와 약간 다르

지만 시림에서 태어난 알지의 기록을 일치한다

 

이 건물은 행정 이지한(1749-8127)이 1978년 집안의 글방으로 건립한 정자이다 처음에는 육화정이라 하였지만 그 후 1930년경 문중에서

지헌 이철명을 추모하는 귀래정으로 개칭하였따 다산리 마을 중앙에 뒤편 주택과 경계담을 사이에 두고 2곽으로 구획되어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능은 대릉원으로 조성된 황남동 고분군의 남편 월성 가까이에 분포하는 수기의 커다란 봉토분들 가운데 월성에 가장 가까운 곳이고 계림의

서쪽에 해당되는 곳에 위치한 경주고분 30호인 내물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다 능이 위치한 곳은 얕은 언덕을 이루고 있다 봉분은 원형으로

지름 21미터, 높이 5.78미터로 주변의 대형분들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은편이다

 

이 마을은 조선초기 15-16세기에 입향한 이래 지금까지 세거해온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양대 문벌을 이루어 온 동성마을이다 우리나라 전형

적인 반촌마을로서 140여 홍의 대소고가가 보존되어 양반들의 생활상과 주거 양식을 잘 보여준다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16키로미터

떨어진곳에 넓은 평야릉 임하고 있는 거꾸로 세운 물자형 산곡이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을 서남방 역수로 안은 지형이다

 

 마릉은 진산인 설창산을 주봉으로 하여 그곳에 흘러내린 세줄기의 구릉이 이루어 놓은 네골짜기, 즉 두동골, 몰붕골, 안골, 장태골을 줌심으로

능선위로 퍼져 올라가며 형성되었다

마을에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양동은 역대 외손마을이라 하여 마을의 형성과정과 관련하여 특이한 관념이 존재한다 즉 고려시대에는

오태사에서 장태사로 조선시대에는 류복하에서 손소로 다시 이번으로 계속해서 외손쪽으로 계승되어 왔다고 한다

 

 일설에는 신라시대에 아산장씨가 처음에 마을에 들어와 그때부터 양좌촌이라 하였다고하나 실제 근거가 분명한 입향조는 손소인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손소의 딸은 여강이씨 번에거 출가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이언적이다 그는 외가인 손씨 대종가에서 출생하였고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인 손중돈의 훈도를 받았다고 한다

 

이 성원은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서 희재 이언적의 유허에 사당과 동,서재 강당 및 누각을 건립하면서 창건한 옥산서원이다

그후 1574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문운의 연총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의 병화에도 피해없이 보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공간구성은 무변루가 중심이 되는 진입부, 강당이 중심이되는 강학부분, 제향기능, 사당부  및 부속사 등 4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뿐만아니라

외삼문-강당-사당은 축선상에 자리하여 전학후묘의 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중층 누각인 무변루가 자리한다 정면 5칸, 측면2칸 규모로 하층은 출입공간으로, 상층은 중당협실형 평면을

꾸미고 원주에 계자난간을 세워 한층 단아하다

 

문루뒤의 중앙에는 원주를 쓴 정면 5칸, 측면2칸규모의 중당협실형 평면의 강당인 구인당이 있는데 좌측 온돌방은 해립재라 하고 우측은 양진재라

하였다 이는 강당 앞 좌측의 민구재, 우측의 암수재라는 동,서재의 재명과 더불어회재학의 요채를 의미하며 그의 귀숙이 구인학이었음을 뜻한다

 

이 건물은 안동권씨의 시조 고려태사 권행과 죽림 권산해, 구봉 권덕린을 배향한 운곡서원 부속정자이다 운곡서원은 1785년(정조9)에 추원사로

건립하였으나 1868년(고종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03년(광무7)_에 설단하여 재사와 전사청을 지었으며 1976년에는 묘우, 동서재,

외삼문, 신문등을 복원하여 운곡서원이라 개칭하였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13층석탑으로 높이는 5.9미터이다 각부의 양식과 조성수법에서 국내의 작품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다 전체의 부재를

화강석으로 조성한것으로서 현재 옛 절터의 원위치에 원형을 잘 간직한채 보존되어 있다

기단은 단층 토축으로서 옛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어느 정도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지느 알 수없다토대의 상면 중앙에는 1단의 석축이 마련되고

그위에 4매석으로 구성된 높직한 2단의 방형굄이 설치되었으며 그위에 13층의 옥신을 받고 있는데이 2단의 굄돌은 곧 기단부 갑석 상면의 굄대

수법으로서 현재는 마치 지대석과도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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