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말 내물왕(재위기간 : 356~402)은 석씨계열 왕조를 대신하여 경주 김씨 계열의
왕조로 교체하였지만, 백제와 가야 왜국으로 구성된 3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였다.
내물왕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서기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았지만,
그로인하여 고구려의 강력한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에따라 내물왕은 조카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지만, 내물왕이 사망하자 고구려의 원조를 받은 실성이 왕위에 올라 이번에는
내물왕의 아들들을 볼모로 보내게 된다.
박제상은 박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왕의 5대손인 신라의 대표적인 귀족으로,
강직하고 계책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눌지왕은 고구려가 후원하였던 실성왕을 살해 한 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복호를
귀국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임무가 아니었지만, 눌지왕이 외교사절을 청하자 망설임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신라의 왕이 누가되느냐 보다 과연 고구려와 얼마나 우호적으로 지낼 수
있느냐에 더욱 큰 비중을 두고 있었으며, 박제상 역시 그러한 고구려의 입장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박제상은 고구려의 장수왕과 대면한 자리에서 '질자(인질)를 교환하는 것은 말세에나
있는 매우 안좋은 풍습이며, 지금 우리왕이 형제를 매우 그리워 하고 있기 때문에 대왕께서
은혜를 베풀어 준다면 크게 감사할 것입니다.'라고 설득하였다.
이에 동북아의 평화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장수왕으로써도,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생각하여 미사흔의 귀국을 허락하여 주었다.
그러나 정말로 어려운 문제는 왜국에 붙잡혀 있는 복호를 무사귀국시키는 일이었다.
먼저 박제상은 미사흔과 뱃놀이를 하면서 오리나 고기를 잡는등 왜인들을 방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뱃놀이를 하는 척 하면서 신라진영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홀로 남겨질 박제상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박제상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미사흔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박제상은 두사람이 함께 떠나면
의심을 살 수 있기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설득하였다.
그러자 미사흔도 박제상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목을 안고 울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미사흔이 떠난 것을 확인한 박제상은, 느긋하게 실내에서 늦잠을 자는 대담함을 보였다.
매일같이 일찍일어나던 박제상이 그날따라 늦잠을 자자, 왜병장수들도 의심하였지만
'어제 늦도록 배를 타서 피곤하여, 일찍 일어 날 수 없었다.'며 태연스럽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리고 미사흔이 도주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왜병들은 박제상을 결박하여
왜왕에게 돌려보냈지만, 자신을 속인것에 화가난 왜왕은 박제상을 즉각 목도라는 곳으로
귀양보냈다.
하지만 왜왕의 복수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왜왕은 사람들을 시켜 박제상을 화형시켰고,
그것도 모자라 불에 탄 시신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박제상은 두 왕자를 모두 무사귀국시켰지만, 자신은 타국에서 객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눌지왕은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하였으며,
박제상의 둘째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눌지왕의 조치는 다소 미흡한 면이 없지않다. 신라의 국력이 극도로 약화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 해도, 적어도 왜국에게 강력한 항의정도는 해야 되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