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시절/고향생각

[스크랩] 안동 예안면의 유래

금강석1 2014. 12. 14. 18:01

禮安面

桂谷里 / 歸團里 / 九龍里 /

棄仕里 / 道木里 / 道村里 /

東川里 / 美質里 / 浮浦里 /

三溪里 / 新南里 / 仁溪里 /

鼎山里 / 舟津里 / 川前里 /

台谷里 /

禮安面

예안 지방은 고구려 때 매곡현(買谷縣)에 속하였으며 신라 때는 선곡현(善谷縣)으로 내령군(奈靈郡)의 영현(領縣)이었다가 고려 태조 당시 성주(城主)로 있던 이능선(李能宣)이 거의(擧義)하여 귀순하였으므로 선성(宣城)으로 고쳐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그 뒤 1018년(현종 9)에 길주(吉州) 즉 안동 땅에 복속되었다가 1376년(우왕 2)에 우왕의 태(胎)를 이 고을에 묻은 것을 기념하여 다시 군으로 승격시켰다가 얼마 뒤에 주(州)로 승격시켰다. 1390년(공양왕 2)에는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또, 공민왕 때 현으로 승격시킨 예안 동쪽에 있는 의인현(宜仁縣)을 병합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13년(태종 13) 현(縣)이 되고, 1895년(고종 32)에 지방관제 개편에 의해 예안군(禮安郡)이 되었다. 읍내, 서면, 북면, 의서, 의동, 동상, 동하 등 7개 면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통폐합에 따라 안동군에 편입되어 예안면이 되고, 동북부는 도산면, 녹전면 등으로 분리되었다.

당시 예안면은 의동면의 분천리, 동상면의 인계리 일부, 그리고 북선면의 외감애리, 동후면 나소곡리, 봉화군 재산면 남면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옛 예안군의 이름을 따서 만든 면으로, 그 관할 지역은 동부, 서부, 선양, 천전, 오천, 부포, 귀단, 태곡, 인계, 동천, 도촌, 삼계, 신남 등 13개 마을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 지역에 안동다목적댐이 건설되면서 많은 동리가 수몰됨에 따라 행정구역의 변경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1974년 월곡면(月谷面)을 폐지하고 교통의 편의에 따라 오천리는 와룡면에 편입시키고, 예안면의 9개 리와 전 월곡면의 정산, 구룡, 미질, 주진, 계곡, 도목, 기사 등 7개 리를 편입시켜 16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또한 삼계출장소를 두어 삼계, 동천, 도촌, 신남, 인계 등 5개 리를 관할하고 있다. 1995년에는 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폐합됨에 따라 현재 16개 법정리에 20개 행정리로 되어 있다.

예안면의 면적은 164.00㎢이며, 인구는 2,784명(2001.12.31)으로 안동시에서 동북단 24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소재지는 정산리이다. 면의 서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와룡면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임동면(臨東面), 동쪽은 영양군(英陽郡)과 접하고 있다. 면의 중앙부를 낙동강 지류인 동계천(東溪川)과 구계천(九溪川)이 흘러 면의 서쪽 경계를 흐르는 낙동강에 합류되며, 동계천 연안에는 비교적 넓은 충적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서쪽은 운남산(雲南山) 등 산지를 이루며 경지 면적은 매우 협소하다. 예안면은 총면적의 78%가 임야인 산간오지의 면으로 20개리 가운데 13개 리가 안동호와 인접하고 있다.


1. 桂谷里

계곡리는 안동군 임북면에 속하였으며 계일, 또는 계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마곡, 전시곡, 장성백리를 병합하여 계곡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안동댐 건설에 따라 월곡면이 폐지됨으로서 예안면에 속하였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계곡리는 압시골, 찰앞시골, 웃게일, 장성백이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구 수는 30여호이다.

◇ 앞시골․전시곡(前是谷)

계일 건너 동쪽으로 1.5㎞쯤 되는 긴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계일 앞 골에 있다하여 앞시골 혹은 압시골로 부르며, 한자로는 전시곡이라 한다. 동리가 길어서 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을 상앞시골 혹은 내전실이라하며, 거리에 있는 마을을 거리앞시골 혹은 걸앞시골이라 부른다.

◇ 걸앞시골․거리앞시골

앞시골 거리에 있는 마을로 걸앞시골 혹은 거리앞시골이라 부른다. 전주류씨 4집을 포함하여 10 가구가 살고 있다.

◇ 웃게일․윗계일(上桂日)

계일(桂日)은 장성백이 마을 남쪽 안동호가에 있는 마을로 풍수지리적으로 계화낙지(桂花落地)의 형국이라 하여 계일이라 불렀으며 윗계일과 아랫계일로 나눈다. 주로 전주류씨(全州柳氏)가 많이 살던 곳이었으나 안동댐으로 인해 아랫계일은 모두 수몰되고 윗계일에 전주류씨 7가구만 남아 있다.

옛날 규중처녀가 저녁에 머리를 감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간 뒤 당(堂)을 짓고 동제(洞祭)를 지냈다하며, 당(堂)터는 좋은 묘자리로 사람들이 욕심을 부렸지만 묘를 쓸 경우 동리가 망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갈매골, 갈마골, 갈마곡(葛馬谷):계일 남동쪽 강 건너편에 위치한 골로서 골 입구에 말이 물을 마시는 형상의 큰 바위가 있다고 하여 갈마골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안동댐으로 인하여 물이 줄면 드러나고 만수가 되면 수몰된다.

◇ 장성백이․장성배기․장성백리(長城百里)

계일 북쪽 500m 지점 산기슭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로 하할지 마을에서 동다리로 가다가 마을부근에서 우측의 작은 다리를 건너 약 400m쯤 들어가면 장성백이 마을이다. 동구에 이정(里程)을 알리는 장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장승이 있는 이 마을의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장승이 서있는 대백󰡑이라는 뜻으로 장성백이, 장성배기라하며, 또 장성백리라 표기하기도 한다.

현재 수몰로 농사지을 경작지가 많지 않아 주로 담배와 같은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으며 마을 앞은 댐 물이 호수를 이루고 있다.


2. 歸團里

이 마을은 구한말 예안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구다니 또는 구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갈동을 병합하여 귀단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는데, 1973년 안동댐이 생기면서 수몰이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귀단리는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나누어지며 가구 수는 60여호를 헤아린다. 귀단 1리는 고통, 와운데, 지촌으로 이루어지며, 2리는 가래실, 인겔, 금곡, 한자골, 새마을 등의 마을로 구성되었다.

◇ 고통(高通)

이 마을은 옛날 귀단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하나 지금은 4집만이 살고 있다. 옛날 이 마을에는 고암사(高岩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하며 마을이름은 고통 혹은 고개라고 부른다. 고통이라고 부르는 유래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서 청량산(淸凉山)으로 몽진할 때 이 마을 앞으로 지나갔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으로 즉, 높은 분〔高〕이 지나간〔通〕마을이란 의미이다.

◇ 와운데․왕운대(王運臺)․구름들[雲坪]

승짓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17가구가 산다.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이 봉화의 청량산으로 몽진할 때 마을 앞으로 지나갔다고 해서 왕운대라고 불렀으나 발음하기 쉽게 와운데라 부른다. 또,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는 운중선자(雲中仙子)가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조성당(操省堂) 김택용(金澤龍, 1547~1627) 선생이 구름들이라 했고, 바위가 흩어져 있는 모양이 꼭 구름이 흩어져 있는 것 같아서 와운대(臥雲台)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연곡(燕谷):와운대와 지촌 사이에 큰골이 있었는데, 그 형국이 제비가 날아 앉은 형국이라 하여 연곡이라 하였다. 안동댐으로 인해 수몰이 되어 주민들은 댐의 언덕 위(새마)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 지촌(芝村)․성조동(聖祖洞)․승짓골․성지골(聖芝谷)

와운대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성조동이라 불렀는데 변해서 승짓골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성지골 혹은 지촌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수몰 지역이라 일부는 이주하였으며 수몰(水沒) 전에는 20여 가구가 살았다.

◇ 가래실․갈내실(葛內室)․갈전(葛田)

인갤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으로 낙동강의 지류인 동계천(東溪川)이 흐르고 그 둑과 마을 주위에 갈대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가래실, 갈내실, 갈전 등으로 부른다. 안동댐으로 인해 마을이 수몰되어 몇 집만이 언덕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으며 생업으로 밭농사를 주로 한다.

◇ 인겔․인포(仁浦)

고통 남쪽에 있는 마을로 인겔, 인갤, 인포라 불렀으며 앞에 동계천(東溪川)이 흘렀다. 현재 수몰된 골짜기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지명만 전한다.

◇ 금곡(金谷)․쇠이골

인갤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3가구가 살고 있다. 지형이 금개구리 형국으로 옛날에 쇠가 많이 났다고 하여 쇠이골, 소이골, 죄이골 등으로 불렀으나 그 후 금곡이라 불렀다. 마을 주변에는 옛날 금을 캐던 금굴이 남아 있으며, 금을 캐는 사람이 여러 번 내왕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을 뒷산에 무성한 푸른 솔에서 유래되어 소이골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지금도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 노루메기:음달마 서쪽에 있는 마을로 2집이 살고 있으며 ‘주장고모형(走獐顧母形)’이라 부르는 봉화금씨(奉化金氏) 시조의 묘가 있다.

◇ 한자골․한재골

금곡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큰 고개, 즉 한〔大〕재 아래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한재골로 불렀으나 변하여 한자골로 부르게 되었다.

◇ 새마을․새마

인갤 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 또는 새마라고 한다. 새마 건너편 산기슭에서 살던 주민들이 1968년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새마 혹은 새마을이라고 불렀다. 현재 강릉김씨 8집이 살고 있다.


3. 九龍里

옛날 안동군 임북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구렁이 있으므로 구렁, 또는 구룡방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달리, 양옥동을 병합하여 구룡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구룡리는 동다리, 원구룡, 소월, 양옥, 원심이, 한바우 마을로 구성되었으며, 가구 수는 약 100호이다.

◇ 동달리(東達里)․동다리․동교(東橋)

이 마을은 옛날에 마을 동쪽 구룡천(九龍川)에 큰 다리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동교리라 불러오다가 예안 삼산(三山)에 거주하던 전주류씨삼산종택(全州柳氏三山宗宅) 및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 1842~1924) 공이 갑오년(1894)에 동학(東學)의 난(亂)을 피하여 이곳으로 와서 학당(學堂)을 열어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을축년(1865)에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그 장자인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난 이후에 ‘동방에 통달(通達)하신 분이 탄생하였다’하여 동달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전주류씨는 고장(故庄)인 삼산(三山)으로 이주하고 지금은 안동인(安東人) 괴암(槐巖) 권재훈(權載勳) 공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또 다른 유래는 구룡리의 이웃 마을인 계곡리에 전주류씨 집성촌이 있었는데, 그 세력이 가까운 동다리까지 뻗쳐 번성하게 되었고, 그 사이의 시내에 다리를 놓게 됨으로써 마을 이름을 동다리, 동달리 혹은 동교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재 마을의 가구 수는 20여 호로 안동권씨가 7집이 살며, 나머지는 각성받이이다.

◇ 원구룡(原九龍)․구룡(九龍)․구룡방(九龍坊)

구룡리는 행정구역 변경으로 여러 마을을 통폐합하여 지금의 구룡리가 되었는데, 이 마을은 통합되기 전부터 구룡, 구룡방으로 부르던 마을로 원래의 구룡이었다고 하여 원구룡이라 한다.

구룡 마을은 지형이 구룡장주(九龍長走) 혹은 구룡쟁주(九龍爭走) 형국으로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다스린다는 구룡치수(九龍治水)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 용당수보:마을로 흐르는 하천을 막아 만든 보이다.

◦ 골미당, 골마당:살지마을에서 원구룡 쪽으로 넘어오는 고개에 있는 당(堂)으로 일제강점기 때 영월신씨 가운데 한 장수가 있었는데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사하고, 그가 탄 말만 돌아왔는데 이곳에서 죽었으므로 그 자리에 금줄을 치고 가물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린다고 한다.

◇ 소월(小月)․장따리

원구룡 북동쪽 골짜기에 있는 작은 마을로 소월 혹은 장따리, 장따리말이라고 한다. 뒷산이 반달모양으로 생겼으며, 또 마을 앞 뒷산이 모두 높아 달을 오래 볼 수 없어서 소월이라 이름하였다는 설이 있다. 현재 소월 마을과 양평을 합해 20여 호가 살고 있으며, 마을에는 현재 폐교된 계곡초등학교 자리에 안동과학대학 구룡연수원이 자리 잡고 있다.

◦ 양평(陽坪):소월 북편(北便) 바로 옆 마을이다. 근처가 산이 높고 골이 깊으나 이곳은 조금 넓은 편으로 다른 곳은 볕을 오래볼 수 없는데 이곳은 보다 오래 볼 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양옥(陽玉)․베드기

소월 동쪽 골짜기에 형성된 작은 마을로 양옥, 약옥 또는 베드기라고 부른다. 진성인(眞城人) 경옥재(景玉齋) 이보(李簠, 1629~1710) 선생이 어릴 때 안동 일직(一直)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학문을 닦았으며, 벼슬은 사옹원참봉(司饔院參奉)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대곡(大谷) 산중(山中)에 집을 짓고 ‘경옥산인(景玉山人)’이라고 호하고 물외(物外)에 소요자적하였는데, 선생은 경전자사(經傳子史)를 비롯하여 여러 학문에 두루 뛰어나 안동 북문(北門)둑에서 임동 대곡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많아 지금도 선생에게 배운 제자들의 후손 30여 집에서는 ‘경옥계’를 조직하여 매년 동지 때 이곳에 모여 선생을 추모하고 우의를 다진다. 이 마을은 경옥재 때부터 양옥이라 불렀으며, 옥돌이 마을에서 나왔다고 한다. 현재 양옥 마을에 11집이 살고, 저뒤골에 4집이 살며 대부분이 안동권씨들이다.

◇ 원심이․원심(遠心, 遠深)․온심(溫心)

양옥에서 약 2㎞ 동쪽에 있는 높고 깊은 산골마을로 들에서 멀고 깊다하여 원시미, 원심이, 원심이라 하였으며, 또 이곳이 삼면이 막혀있고 북쪽만 트여 난시(亂時)에 피난에 알맞고 편한 곳이라 하여 온심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가구 수는 8집이다.

◇ 한바우

원심이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동리로 민가는 없고 현재 기도원이 들어서 있다. 한바우로 들어가는 입구의 절벽이 얽은 퇴적암으로 형성되어 있어 다락바위얼갱이 혹은 다락바우얼겅생이라고 부르는데 한바우란 지명은 여기서 비롯된 이름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4. 棄仕里

새터 남서쪽에 자리 잡은 동리로 영가지(永嘉誌)에는 ‘속명은 지실어촌이다. 도목촌(桃木村) 북쪽 10리쯤에 고려의 사간(司諫) 권정(權定, 1353~1411)이 우리 태조조(太祖朝)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살았는데 후인들이 그 마을을 이름하여 기사(棄士)라고 하였다. 뒤에 우좨주(禹祭酒; 禹倬)의 후예 직장(直長) 우홍균(禹洪鈞)이 여기서 살았다. 현감(縣監) 박구(朴球)가 이어 살았다. 현(縣)에서 40리 떨어졌다’고 기록하였다.

이 마을은 산기슭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처음에는 지실어촌, 지실이, 기실기, 지시러기 등으로 불렀으며 또 옥산동(玉山洞)이라 하였으나 고려 말에 사복재(思復齋) 권정 선생이 이곳에 은거한 후 기사촌이라 불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26년 진성인(眞城人) 이수정(李守貞)이 찬(撰)한 고려좌사간사복재권선생정유허비(高麗左司諫思復齋權先生定遺墟碑)를 살펴보면 이 마을을 기사촌으로 부르게 된 유래가 잘 나타난다.

‘옛날 고려의 운명이 끝나려 할 즈음 군주는 황잡(荒雜)하고 정치는 어지러웠는데, 당시 좌사간(左司諫)으로 있던 선생은 뛰어난 문장과 깊은 학문으로 국왕에게 바른 말을 간하다가 뜻을 거슬려 좌천되었다. 조선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가장 먼저 선생의 명절(名節)을 높이 평가하여 누차 승지, 대사간, 대사헌 등으로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자신의 거처를 옥산(玉山) 속으로 옮기고 이름을 감추고 살다가 1412년(태종 12)에 몰(沒)하자 옥산 기슭에다 장사지냈다. 비석 전면의 고려좌사간(高麗左司諫)이라는 분이 바로 선생의 지조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아는 이가 없었고 유독 촌옹(村翁)과 야로(野老)들만 그의 절개를 높이 여겨 그 마을〔玉山洞〕이름을 기사리(棄仕里:벼슬을 그만둔 마을)라고 지었던 것이다.’

기사리는 행정구역상 안동군 임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전곡(대밭말), 서당곡, 아휴리를 병합하여 기사동(리)가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되면서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기사리는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구분하는데 전체 가구 수는 90여호로 예안면에서 큰 마을에 속하는 편이다. 기사 1리에는 아마리, 대밭골 등의 마을이 있으며, 기사 2리에는 안마을, 대밭말, 서당골, 당목 등의 마을이 있다.

◇ 아마리․아휴리(阿休里)․아촌(莪村)

기사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며 1689년(숙종 15)에 창녕인(昌寧人) 조규승(曺圭承)공이 개척했다고 전해진다. 연대 미상이나 채정승이라는 분이 벼슬을 하여 이곳을 지나 가다가 경치가 좋아 쉬어갔다 하여 아휴리로 불리게 되었다한다. 지금은 아마리, 아마리골, 안마리, 아촌등으로도 부르며 가구 수는 약 40여호이다.

◇ 대밭골․죽전곡(竹田谷)

기사리에는 대밭골로 불리는 2개 마을이 있다. 하나는 아마리 남쪽 안동호(安東湖) 가에 위치한 마을로 기사 1리에 속한 대밭골이며, 다른 하나는 서당골 북쪽에 위치한 기사 2리의 대밭골인데 두 마을 모두 마을을 개척할 당시 무성한 대나무 밭을 베어내고 마을을 이룩하였다 하여 대밭골 혹은 대밭말로 부르며 한자로는 죽전곡이라 한다.

◦ 삼시랑(三侍郞), 삼시랑재:안마을과 기사 2리 대밭골 사이의 목재를 말하는데, 박운봉(朴雲峯), 권사간(權司諫; 權定), 우좨주(禹祭酒; 禹倬) 선생이 넘어 다닌 고개라 하여 삼시랑 혹은 삼시랑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 안마을

정산우체국 앞에서 좌측 길로 접어들어 배나들 가는 길로 1km 쯤 가다가 고개를 넘으면 나타나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나 입향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주민 권영도씨의 6대조 때 이미 이곳에 들어와 살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구 수는 10집으로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비롯하여 각성 10여집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 서당골(書堂谷)

기사 2리의 대밭골 남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고려가 망하자 기사에서 은거 생활을 하던 사복재(思復齋) 권정(權定) 선생이 이곳에 서당을 짓고 훈학(訓學)하였다고 하여 서당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가구 수는 10여집으로 예전에는 안동권씨가 많이 살았다.

◇ 당목․길마재

구(舊) 기사에서 예안면 미질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당목이라고 부르며 인가 3~4호가 살고 있다. 모양이 소 지르매처럼 생겼다고 하여 길마재 혹은 지르매재라고도 불렀다.


5. 道木里

수몰전 이 마을은 원래 영양남씨(英陽南氏)와 흥해배씨(興海裵氏)의 세거지(世居地)로 조선조에 학행으로 군위훈도(軍威訓導)에 천거된 영양인(英陽人) 남첨(南襜) 선생이 이곳 산수의 아름다움을 취택(取擇)하여 와룡면 주촌(周村)에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산천의 그윽하고 아름다움이 마치 무릉도원(武陵桃源) 같고, 복숭아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도목(桃睦) 또는 도목촌(桃睦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어떤 점쟁이가 와서 마을 주위에 복숭아나무가 있으면 해롭다고 하여 도목촌(道木村)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또 도목(道睦)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남첨 선생이 강학하던 장소를 기려 후손들이 8칸의 정사(精舍)를 지은 뒤 편액을 ‘도목정사(道睦精舍)’라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도(道)로서 일족을 돈목(敦睦)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영가지의 부북(府北) 임하현(臨河縣)에 실린 도목촌 부분을 보면 ‘도목촌은 현(縣)의 북쪽 35리에 있으며 본부(本府)에서 35리 떨어진 곳에 있는 동네인데, 이곳에는 100여자 되는 석벽(石壁)이 있어 이를 ‘검암(儉巖)’이라 불렀으며, 그 바위 위가 평평한데 대(臺)를 지어 이름하기를 ‘임연(臨淵)’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관찰사 배삼익(裵三益) 공이 여기에다 대를 짓고서 임연이라 자호하였는데 관찰사의 선군(先君) 증참판(增參判) 배천석(裵天錫, 1523~1573) 공이 처음 와서 살았다’고 기록되어있다. 또 배천석 공이 서후면 금계(金溪)로부터 도목촌으로 이거한 이래 공의 아들인 임연재(臨淵齋)가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고 벼슬이 황해관찰사에 이르렀으므로 그 친우인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선생이 이 마을의 이름을 ‘도맥(道脈)’으로 부르기를 권했으나, 공은 과분하다고 하여 ‘도목(桃木)’으로 정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도목리는 행정구역상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에 속해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기리와 동후면의 구미동, 신기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목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73년 안동댐 건설로 말미암아 도목촌의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도목리의 가구 수는 3개 반에 약 30호로 가래골, 구미, 오미골 등의 마을에 나누어져 있다.

◦ 매봉재:도목에서 예안면 주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지형이 매의 형국으로 생겼다한다.

◦ 질재:도목에서 예안면 미질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호고개:구미에서 도목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구미(九尾)

도목 마을 등 너머에 위치한 마을인데 도목에서 구미로 오가는 길이 여러 짐승의 꼬리같이 구불구불하다하여 구미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수몰 전에는 30여 가구였으나 지금은 8가구가 산다.

◇ 오미골․오목골

도목촌 뒷골목이며, 기사에서 재를 넘어 도목으로 가는 길목이 되는 마을로 오미골 혹은 오목골이라 한다. 산지를 개간하여 특수작물을 생산하고 있으며 농가 5가구가 흩어져 생활하고 있다.


6. 道村里

도촌리는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며 길골, 또는 질골, 길곡(吉谷), 도곡(道谷)으로 불렀는데 그 유래는 옛날에 물편 사람들이 영해에서 소금이나 해산물을 지고 영양을 거쳐서 장갈령(長葛嶺)을 넘어 이 마을을 지나 예안까지 내왕하였는데, 장갈령에서 이 마을로 뻗어 내려오는 길을 길골이라 하였으며, 한창 때는 3, 40명이 이 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통마, 톳골, 오미골, 수락골, 고사리골, 평지마, 사래실을 병합하여 도촌동(리)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피박 혹은 피박골로도 부른다. 피박골로 부르는 이유는 사래실 앞산에 고지박을 닮은 명당이 있는데 그곳을 껍박이라 하며 한자로 쓰면 피박(皮朴)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이 마을은 사례실, 평지마, 지통마 등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 수는 약 40호이다.

◇ 사례실․사래곡(砂來谷)

평지말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골이 깊고 산기슭에 형성된 밭의 사래(이랑)가 하나같이 길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례실, 사래실, 사래곡 등으로 부른다.

◦ 회방(回方)잇골, 회뱅이:사래실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사람이 살았으나 지금은 살지 않는다. 마을에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성해 망하였다고 하며, 또 묘자리와 관련된 풍수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김씨(金氏) 문중에서 풍수가 정해 준 묘터를 파자 반석이 나와서 하관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다. 이때 사위의 극력 반대로 다른 곳을 파기로 결정하고 반석을 괭이로 내리치니 반석이 깨어지면서 학(鶴) 두 마리가 나와 한 마리는 눈을 다쳐 잡히고, 나머지 한 마리는 날아가다가 회방(回方:다시 돌아옴)하여 이웃 마을인 동천리(東川里)의 원학(遠鶴)에 앉았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마을 이름을 회방잇골 또는 회뱅이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때 눈을 다쳐 잡힌 학은 관(棺)과 함께 묻어 버렸는데 그 후에 이 가문에서는 눈이 애꾸인 진사(進士) 한 분이 나왔다고 한다. 그 묘터는 고지박을 닮았다고 해서 지금도 고지혈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 평지마․평지촌(平地村)

길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도촌리의 자연마을은 대부분 골짜기에 분포되어 있으나 이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넓은 지역에 터를 잡아서 평지마, 평지말, 평지촌 등으로 부른다.

◦ 토골(兎谷), 톳골:평지말 동쪽에 있는 골로서 뒤에는 토골재가 있고, 옥(玉)토끼가 달을 바라다보는 형국인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의 안동김씨 명당이 있다하여 토골, 토곡으로 부르게 되었다.

◦ 오미골(烏尾谷, 烏味谷):평지마을 남동쪽에 위치하며 마을로 뻗어 내린 뒷산 줄기의 끝이 마치 까마귀의 꼬리와 흡사하다고 하여 오미골, 오미곡이라 한다. 십 리나 되는 긴 골짜기에 1, 2km씩 뜸뜸이 흩어져 살고 있다.

◦ 새몰, 새몰터, 새뫁:평지마을에서 약 2km 위에 위치한 곳으로 원래는 인가가 없었으나 한 두 집씩 살기 시작하여 마을이 되었으므로 새몰이라 부르게 되었다.

◦ 고사리골:평지마을 큰길에서 북동쪽으로 산모퉁이 오솔길을 따라 2km쯤 올라가면 자리 잡은 산골마을로 옛날부터 고사리가 많이 난다고 하여 고사리골이라 하였다. 예전에는 산전을 일구고 고사리, 약초를 채취하여 생활하는 농가가 있었으나 현재는 떠나고 사람이 없다.

◦ 수락골(水落谷):고사리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작은 폭포가 있어 물이 떨어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지토마․지통말․지촌(紙村)

토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 마을에 한지를 뜨던 통(지통)이 있었다 하여 지토마, 지통말 혹은 지촌이라 하였다.


7. 東川里

이 마을은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학리, 부모리, 장갈리를 병합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내(川)의 뜻을 따서 동천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으며 가구 수는 28호이다.

◇ 원학(遠鶴)․원학리(元鶴里)

불미골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김씨(金氏)들이 도촌리 사래실의 회방잇골에서 장사를 지내는데, 그 묘에서 학이 나와 이곳으로 날아와 앉았다고 하여 원학, 원학이, 원학리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한다.

◇ 불미골․부모리(夫毛里, 夫牟里)

거리마을에서 불미골로 들어가는 입세가 불미모양으로 생겼다하여 불미골이라 부르며, 이명(異名)으로 부모리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현재 골짜기 안에는 인가가 없다.

◦ 애기무덤, 애기묘:원학이에서 불미골로 들어가는 경계지점에 있는 묘로서 어느 처녀의 무덤이라고 한다. 무덤을 건드리면 해를 입는다 하여 보호되고 있으며 가물 때 불을 놓으면 비가 온다고 한다.

옛날에 이 부근의 길은 말이 다닐 수 있는 대로였는데, 어느 벼슬아치가 공무를 수행차 이 길로 지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어떤 처녀가 “같이 가자”하며 “내말 좀 듣고 가라”며 그 사람의 뒤를 따라 왔으나 그 사람은 공무에 바빠 뒤돌아보지 않고 자기의 갈길을 갔다고 한다. 그러자 그 처녀는 “오빠 저는 죽습니다”하고 그 밑에 있는 소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한다. 그래서 길가의 늘애 위에 무덤을 쓰고 애기묘라 불렀다하며 처녀가 몸을 던진 못은 애기소라 부르게 되었는데 현재 애기소는 전하지 않는다.

◦ 장갈리(長葛里):불미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예안에서 영양군 청기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장갈령(長葛嶺)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다. 길게 뻗어 있는 모양이 칡덩굴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있다하여 ‘장갈’이라 하며, 동쪽으로 영양, 북쪽으로 봉화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 지프냇골:불미골 위에 있는 골짜기로 지프(깊은) 내(川)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8. 美質里

미질리는 구한말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으로서 미지리, 또는 미질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계, 벌탄, 벽지곡, 동파를 병합하여 미질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다. 월곡면의 중심지가 되어 면사무소, 지서, 우체국, 국민학교, 고등공민학교, 시장 등이 있었으나 1973년 안동댐 건설로 말미암아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7월 1일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미질리에 속한 마을은 현재 움터 마을 하나 만 있으며, 가구 수는 9가구로 와룡면 절강리와 더불어 안동시에서 가장 적은 가구 수로 구성되어 있다.

◇ 움터․음(飮)터

옛날에는 이곳이 약수탕으로 유명하여 움터 혹은 음(飮)터라 부르게 되었다한다. 원래 이곳에는 옛날에 민가가 없었으나 안동댐 수몰지역에서 이주해온 농가 서너 집이 산다.

◦ 재궁골:고성이씨 안동입향조로 이조참판에 증직된 이증(李增, 1419~1480) 공과 정부인(貞夫人) 경주이씨의 묘제를 위한 재사가 있었다하여 재궁골로 부른다. 수다산(水多山) 아래에 재사(齋舍)가 있었음으로 ‘수다재(水多齋)’라 불렀는데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어 선생의 묘소만 남겨두고 1974년 예안면 기사리로 옮겼다가 2001년에 다시 안동시 정상동 반구정(伴鷗亭) 앞으로 이건하였다. 이증 공의 묘소는 수다산에 축좌(丑坐) 미향(未向)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풍수설로 와우형(臥牛形)이라 하며 우리나라 10대 명산(名山)으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9. 浮浦里

이 마을은 고려 중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시행해 온 역원공영제도(驛院公營制度)에 의하여 예안현(禮安縣)에 속했던 부라원(浮羅院)이 있었으므로 부라원, 부라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예안군 동하동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천동과 의동면의 분천동 일부를 병합하여 부포동(리)이라 해서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74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부포에 오래 전부터 살았던 성씨로는 호군(護軍)으로 있던 안동권씨(安東權氏) 경력(經歷) 권간(權簡)의 상세(上世)로부터 살았다고 하며, 그 후 금숙(琴淑)이 권간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하였으며 조금 뒤에는 진성이씨(眞城李氏)들이 입향하였다고 한다. 수몰 전 부포리는 넓은 들이 기름진 100여호의 큰 동리로 산천이 아름답고 들이 넓어 비교적 생계가 넉넉해서인지 예부터 수(壽)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 수향(壽鄕)이라 부를 만큼 장수를 누리는 사람이 많았다.

현재 부포리에는 역동, 가늠골, 호사골, 햇골 등의 마을이 남아 있으며 가구 수는 30여 가구로 예안면에서 적은 수에 속한다.

◇ 역동(易東)․화왕촌(火王村)․북계(北溪)

이 마을은 처음에 화왕촌이라 불렀으나 후에 북계라고 고쳤으며 그 후 역동으로 불렀다. 늑정(櫟亭) 권시중(權是中, 1572~1644) 선생이 편찬한 선성지(宣城誌)의 북계사적(北溪事蹟) 조를 보면 마을이름을 화왕이라고 부르다가 북계라고 고친 유래가 잘 나타난다.

‘마을은 현 동쪽 9리쯤에 있는데 속명은 화왕(火王)이다. 만력 기해(己亥, 1599)년에 내〔권시중〕가 면계(綿溪)로부터 이 마을로 터를 옮겨 ‘화왕’이라는 명칭은 매우 용렬하고 평범하여 진로(陳盧) 두 선생이 사시던 마을 이름에 의거하여 ‘북계’라고 고쳤다. 그리하여 월천(月川) 조목(趙穆) 선생에게 질문을 하니 선생께 매우 그것을 옳게 여겨서 드디어 북계로 고쳤다. 이로부터 원근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북계로 불렀다. 화왕이라는 명칭이 일시에 끊어지니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마을은 곧 청량산 서쪽 자락 낙수(낙동강) 동쪽 언덕이다. 부라촌(浮羅村)이 동쪽에 있고, 광문봉(廣文峯)이 우뚝하게 북쪽에 솟아서 주산(主山)이 되고 운봉(雲峯)이 서쪽에 솟아 있고 부용봉(芙蓉峯)은 남쪽에 빼어나 있다. 운봉으로부터 부용봉에 이르기까지는 구불구불 3, 4리를 내려와 이 마을의 안산(案山)이 된다. 그 형세가 마치 병풍을 펼쳐 놓고서 이 마을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문과에 급제한 권경달(權景達)이 예부터 이 마을에 살았고, 훈도 남륙(南稑)이 울진 사람으로서 권경달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살게 되었으며, 윤우(尹宇)는 안동 사람으로서 역시 남륙의 사위가 되어서 이곳에 살았으나 일찍 죽었고 자손이 있다.’

이 마을이 지금의 소지명인 ‘역동’으로 부르게 된 계기는 1570(선조 3)에 퇴계(退溪) 선생의 발의로 이 마을의 오담(鰲潭)가에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2~1342) 선생을 기리는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면서부터이다. 1684년(숙종 10)에 ‘易東’이라 사액되었는데 역동이란 우탁 선생이 역(易)을 해득하여 이 땅에서 강학함으로서 역(易)이 동쪽(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역동서원은 1868년 훼철되어 1966년 지방 유림의 발기로 1969년 안동시 송천동에 복원되었다.

◦ 민왕대(愍王臺):역동 북쪽에 있는 바위로 높이 50m, 너비 4.5m이며 고려 공민왕이 쉬어 간 곳이라 한다.

◇ 가늠골․가음곡(柯陰谷)

한자로 가음곡이라 부르던 것이 변해서 가늠골이 되었으며 8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 뒷산 능선정상에 신선바위가 있는데 편편한 바위 위에 윷판모양의 구멍이 새겨져 있다.

◇ 호사골․호소골(虎嘯谷)

선성지(宣城誌) 부라(浮羅) 사적(事蹟) 각명(各名) 부분을 보면 호소곡(虎嘯谷)으로 표기하였으며, 마을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 골이 가장 깊고 긴데 좌우에 있는 조그마한 골의 이름은 모두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하였다.

선성지의 기록처럼 호소골은 길고 깊은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호사골, 호수골, 호소골 등으로 부른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에 호랑이가 나와서 때때로 울었다고 하여 호소곡이라 이름하였다는 설과 또, 마을 입구에 맹호등(猛虎嶝)이란 산이 있어서 호소곡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 임경대(臨鏡臺):호소골 아래에 있는 못안마 위에 있다. 의촌리로 가는 큰 길가에 성성재(惺惺齋) 금란수(琴蘭秀, 1530~1604) 선생의 종택이 있으며, 길 건너 아래에 선생의 정자인 성재(惺齋)가 있다. 임경대는 성재 앞을 흐르는 동계(東溪) 가의 바위를 말하는데, 바위의 전면에 ‘臨鏡臺’와 ‘活源塘’이란 글씨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 성재(惺齋):성성재(惺惺齋)가 25세 때 이곳 동계 가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학문에 힘썼는데, 그 스승 퇴계 선생이 친필로 ‘惺齋’라고 두 자를 내려주면서 면려(勉勵)하시고,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팔영시(八詠詩)를 남기고 바위에 이름을 지었다.

선성지의 기록을 보면 ‘주인은 현감 금난수인데 새로 정사를 지어서 자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삼았다. 퇴계 선생께서 이곳에 유람하시고 인해서 대(臺)와 당(塘)과 재(齋)의 이름을 지었는데, 재는 성성(惺惺)이요, 당은 활원(活源)이며, 세 개의 대는 하나는 임경(臨鏡), 두 번째는 풍호(風乎), 세 번째는 총춘(摠春)이며, 또 각처에 모두 시(詩)가 있다’고 하였다.


10. 三溪里

예안군 동상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늣골, 성황리, 오도락, 원음, 고감을 병합하여, 성황리 앞에 세 내가 합하여 흘러가므로 그 뜻을 따서 삼계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삼계리는 현재 수능골, 성황, 오평, 원음, 고감, 이들리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 수는 약 100가구이다.

◦ 밀바들:고산지역의 평지에 비교적 넓은 밭이 있고 밀농사를 짓던 곳이라 하여 밀바들 또는 밀바드래라고 한다. 옛날에는 인가가 없었으나 1960년대 이후에 형성된 마을이다.

◇ 수능골․수눗골․수릉(壽陵)

서낭대이 남쪽 계곡에 있는 마을로 30 여 년 전 영천이씨(永川李氏)가 이곳에 와서 마을을 처음 열고 수릉이라 이름지었다고 하며 지금은 수능골 혹은 수눗골이라 부른다.

◇ 성황(城隍)․서낭대이

삼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마을 모퉁이에 성황당이 있어서 성황, 성황대이, 성황댕이, 서낭대이, 서난댕이 등으로 부른다. 현재 당집은 없어졌으나, 당 나무 수 그루가 남아 있어 동민들이 정월 보름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올린다.

◇ 오평(梧坪, 烏坪)․오드래기․오도락(吾道樂)

머누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오동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며, 또 마을 뒷산의 생김새가 까마귀가 나뭇가지를 물고 나르는 형국이라 하여 오평, 오드래기, 오드레기, 오드랭이, 오도락, 오드락 등으로 부른다. 1700년대에 청송심씨(靑松沈氏)가 마을을 이루었고, 하천부지가 개간되면서 과수원이 조성되면서 인가도 과수원 가운데 자리잡게 되었다.

◇ 원음(遠陰, 遠音)․머누골․모누골․머루골․머늠

서낭대이 북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높고 골이 깊어 응달이 지는 시간이 많다고 하여 원음이라 하였으며, 그밖에도 머누골, 머루골, 모누골, 머늠 등으로도 불렸다. 마을 앞에는 1957년 삼계국민학교가 개교되고 1976년에 예안면 삼계출장소가 개설되면서 ‘학교마’라 부르기도 하였다.

◇ 고감(古監, 高甘)․고가무․고감우

원음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선성현 상리면에 삼계동이 소속되어 있을 때 고감사(高監司)가 살았었다고 해서 고감 또는 고가무, 고감우 등으로 불렀다. 현재 개울가에 인가 10여호가 모여 살고 있다.

◦ 황정턴지, 황정펀지:원음 서쪽 고산 지대의 국유림 지역을 이르는 지명이다. 1950년대에 한 두 가구가 올라가서 살았으나 1972년 삼계목장이 개설되면서 농토와 임야가 초지(草地)로 바뀌고 인가(人家)는 없어졌다.

◇ 이들리․어드래기

고감 남서쪽 고산지대에 있는 들이다. 1950년대에 인가가 농토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하여 4가구가 살고 있으며 이들리, 이드리, 어드래기 등으로 부른다.

 

11. 新南里

예안면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며 봉화군과 닿아 있다.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나, 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죽, 정자곡, 구통, 두곡, 산양평, 점곡과 봉화군 재산면의 남면리 일부를 병합하여, 산성(山城) 남쪽이 되므로, 그 뜻을 따서 신남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신남리는 현재 정자골, 선양바들, 자운, 높은데, 구티미, 점곡 등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 수는 70여호를 헤아린다.

◇ 정자골(亭子谷)

자운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경내에 조선시대 때 영천인(永川人)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선생의 신도비와 농암 선생의 재사인 자운재사(紫雲齋舍)가 있다.

◇ 선양바들․산양바드래․새양바들․새야바드래․산양평(山羊坪)

신남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주변의 다른 마을에 비해 높은 곳에 형성된 동네이다. 마을의 지형이 염소가 그물을 벗어나는 형국이라 하여 불려진 이름으로 산양바드래, 새양바들, 새야바드래 등으로 불렀다. 또 옛날 이 마을에 산양사(山羊寺)라는 사찰이 있어서 산양평이라고도 불렀는데 변하여 선양바들로 부른다고 한다.

◦ 두곡(斗谷), 말골, 말곡:산양바드래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말〔斗〕이 차면 부어야 하는 유래에서 오래 거쳐하면 손재(損財)가 있다고 하여 이를 피하기 위해 말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 금바우, 굼바우, 구무바우, 병풍바우, 평풍바우:산양바드래 북쪽에 있는 바위로 병풍처럼 생겼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안동과 봉화가 지역 다툼으로 이 바위에 굴(구멍)을 뚫기 시작하였는데, 안동에서 굴을 더 많이 뚫어서 이 지역(신남리)을 안동에서 차지하였다고 한다.

◦ 굼골, 궁곡(弓谷):두곡(말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산의 형국이 활같이 생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 자운(自雲)․자원(自院)

정자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안동시와 봉화군의 경계지점에 있는 섬밧재 밑에 형성된 마을로 운중선자형(雲中仙座形)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옛날 이 마을이 봉화군에 속하였을 당시 마을 주변에 인가가 드물었으므로 행인들이 숙식할만한 곳이 없었는데, 마을 자체적으로 행인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원(院)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고 하여 자원, 자원이 또는 자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다릿골:자원이 남쪽에 있는 마을로 동구에 조그마한 다리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십이데미:자운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돌더미가 열둘이 있었다고 한다.

◇ 높은데․높은대․고죽(高竹)

정자골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지대가 매우 높은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높은데 혹은 높은 대(臺)라고 부르며, 또 이곳에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생하고 있다고 하여 고죽이라고도 한다. 고려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蒙塵)왔을 때에는 이곳에 산내성(山內城)의 남문(南門)이 있었다고 한다.

◦ 절골:높은대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인가가 없다.

◇ 구티미․구통(九通)

정자골 남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높아서 사방을 볼 수 있다고 하며, 안동에서 영양으로 가는 길목이 아홉 군데나 있었다고 하여 구티미, 구터미, 구통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 점곡(店谷)․말곡

산양바들 동쪽에 있는 마을로 사기 점(店)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말을 사육하여 말곡이라 하였고 지금은 소부점이 있었다하여 소부점의 끝자인 ‘점(店)’자를 따서 점골 혹은 점곡이라 한다.


12. 仁溪里

예안면의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안동군 동상면에 속해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구리, 도동리, 전두리, 건천리, 송곡을 병합하여 동계천(東溪川)의 뜻을 따서 인계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근래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인계리는 현재 청구, 독실, 상전두, 하전두, 건천, 솔골 등의 마을이 있으며 가구 수는 약 100호이다.

◇ 청구(靑丘)․청구(靑丘)들

독골 남쪽들에 있는 마을로 청송심씨(靑松沈氏)가 살았다고 한다. 마을 앞에 숲이 우거진 언덕이 있으므로 푸른 언덕이란 의미로 청구 혹은 청구들이라고 불렀으나 80여 년 전에 이 언덕을 깎아 내어 논을 만들었다고 한다.

◇ 독실․독골․도곡(陶谷)․도동(陶洞)

바드래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예안군 상리면 사무소가 있었다. 옹기를 굽는 굴이 있었으므로 독실, 독골 혹은 도곡, 도동 등으로 불렀다.

주지봉:독골 앞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가 바위로 둥글게 되어 있어서, 예안 지방에서는 밥그릇이 높으면 “독골 앞 주지봉 같다”는 말을 하였으며, 또 주지봉이 상투모양으로 불쑥 튀어나와 배가 심히 부른 모양을 하고 있어 앞이 툭 튀어나온 모양을 말할 때 “독골 앞산 같다”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 상전두(上田頭)․웃바드래

전두리(田頭里)는 인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인계리의 다른 마을에 비해 밭이 높은 곳에 있고, 또 위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바드래 또는 밭머리라고 부른다. 전두리는 상전두와 하전두(下田頭)로 세분하는데 상전두는 우리말로 웃바드래라고 하며 전두리의 위쪽에 형성된 마을이다.

◇ 하전두(下田頭)․아랫바드래

전두리에서 아래쪽에 위치하여 하전두라고 하며 우리말로는 아랫바드래라고 부른다.

◇ 건천(乾川)

독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 내〔川〕에 돌이 많아서 비가와도 얼마 안 가서 내가 빨리 마른다고 하여 건천이라 한다.

◦ 싸리골〔杻谷〕:건천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싸리〔杻〕가 많이 자생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솔골․송곡(松谷)

건천 남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이곳에 송림(松林)이 울창했으므로 솔골 또는 송곡로 불렀다. 평산신씨(平山申氏)가 들어와 솔을 치고 개간하였다고 한다.


13. 鼎山里

정산리는 구한말 안동군 임북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정정리(上鼎井里), 하정정리(下鼎井里), 등산리(登山里), 계곡리(桂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정정(鼎井)과 등산(登山)의 이름을 따서 정산동(리)가 되었고, 1934년에 다시 행정구역이 변경됨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7월 1일 월곡면이 폐지되면서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정산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지며 전체 가구 수는 190여 가구로 예안면에서 가장 많은 주민이 산다. 정산 1리는 시장, 등재, 상활지, 하활지, 마골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산 2리는 샛터, 오리실, 중마, 솥우물로 이루어져 있다.

◇ 시장(市場)․억산(億山)

정산 시장이 들어선 자리를 말하는데 약 50여호가 산다. 예전에는 억산(億山), 억새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옛날 이곳에 억(億) 부자(富者)가 살았다고 한다.

◇ 등(登)재․등현(登峴)․등산(登山)

새터 남쪽에 있는 큰 마을로 이 마을의 위치가 주위의 다른 마을에 비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오를 등(登)’자를 써서 등재, 등현 혹은 등산이라 한다. ‘고개를 오른다’, ‘재를 오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괘등형(掛燈形)의 명당 두 곳이 있다고 하는데 한 곳은 흥해배씨의 묘소이며, 다른 한 곳은 진성이씨의 묘소라 전한다. 이 마을은 흥해배씨와 광산김씨가 거의 동시에 들어와 정착한 곳이라고 하는데 현재 각성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활지(活地)․살지(薩地)

활지는 새터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새터에서 등재를 지나 동남쪽으로 가다가 동다리 마을을 조금 못 미쳐 있다. 상활지(上活地)와 하활지(下活地)가 있는데 상활지는 하활지에서 북쪽으로 1km남짓 더 들어가면 있으며, 하활지는 길거리에 있다해서 거리활지라고도 부른다. 현재 상하(上下) 활지를 합해 약 10호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영가지에 따르면 ‘속명은 살지(薩地)라고 하며 현(縣)의 40리에 있다고 하였다. 삼한(三韓) 때에 왜적이 쳐들어오니 사람들이 많이 여기로 피난하여 면하였다. 그러므로 이 이름이 있다고 하였다. 마을 북쪽 2리쯤에는 왜적과 싸워 이긴 곳이 있으며 아직까지 왜적의 무덤이 여러 겹 쌓여있다’고 기록하였다. 또 구전되는 말에 따르면 이 마을은 매우 아늑해서 삼한(三韓) 때 왜란을 피하여 난민들이 이곳에 와서 살았다하며, 고려 공민왕 때는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온 난민들의 정착지로 난을 피하여 살터라는 의미로 ‘활지’ 또는 ‘살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활지탕:활지에 있는 샘물로 약수로 유명하며 고려 공민왕이 청량산에 왔을 때 이 물을 가져다 마셨다고 한다.

◦ 두들활지:활지 앞 벌판을 말하며 활지를 중심으로 웃활지와 아랫활지로 세분하기도 한다.

항거리:하활지 서쪽에 있는 한(큰) 거리를 말하며 변하여 항거리로 부른다.

◇ 마골․마곡(麻谷, 磨谷)

등재의 남쪽, 등재에서 기사동으로 넘어 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등재마을 건너편에 있다. 옛날 이곳에 삼〔麻〕밭이 있어서 삼밭골 혹은 마골로 불렀다고 한다. 현재 6집이 살고 있다.

◇ 샛터․신기(新基)

오리실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선조 때 의성인(義城人)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 1547~1627) 선생이 처음 마을을 개척한 후 새로 생긴 마을이란 의미로 새터, 샛터라 하였으며 한자로는 신기라 한다. 의성김씨의 집성촌으로 마을의 규모가 컸으나 도시 진출 등으로 지금은 가구가 많이 줄어들어 4가구가 산다.

◇ 오리실(梧里室, 梧里實)․오곡(梧谷)

솥우물 남쪽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생성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마을에 구전되는 말에 따르면 고려시대 때 이미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건너편의 샛터 마을이 생길 무렵 이 마을의 호수가 50여 호를 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마을은 유씨가 먼저 살다가 떠나고 그 뒤 경주최씨 정무공(靖武公) 12세손 최문해(崔文海, 1850~1932)씨 때부터 경주최씨가 들어와 지금까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 마을의 동구 앞에 원(院)이 있었다하고 지금의 동구 부근은 오동나무 숲이 우거져서 마을 안을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마을 안에 들어오면 바람이 없어 마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따스하다고 하여 동리 이름에 ‘집 실(室)’자를 붙였다고 하며, 동구에 오동나무가 무성하다하여 하여 ‘오리실’ 혹은 마을 안에 다섯골이 형성되어 있는데 담배계골, 바밭골, 곳짓골, 아래골, 가장골이 있어 오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마을의 어딘가에 오리를 닮은 형국이 있어 오리실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재 마을에는 경주최씨를 비롯하여 각성 6가구가 살고 있으며, 마을 안에 장수바위가 있어 샘물의 질이 좋고 이로 인하여 예부터 이 마을에는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 원앞들:오리실 동구 앞 들판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옛날 이곳에 원(院)이 있었다고 하여 지금도 이곳을 원앞들이라 한다.

◦ 섬밭:옛날 이 마을에는 늪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조그마한 섬이 있었다고 하여 섬밭이라 한다.

◦군지직끝:옛날에 이곳에 그네를 매어 그네타기를 하며, 주아을과 샛터마을이 서로 자기 마을의 힘을 과시하였다고 한다.

◇ 중(中)마․중정(中鼎)

이곳의 지세가 솥 부뚜막형같이 생겼고, 그 가운데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중정(中鼎), 중마, 중마을이라고 한다. 안동권씨, 안동김씨를 포함하여 약 10호가 살고 있다.

◇ 솥우물․정정촌(鼎井村)

정산시장에서 북서로 1.5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8가구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땅 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가 명천(名泉)이라 정산(鼎山)의 ‘정(鼎)’자와 우물 ‘정(井)’를 취해 지명을 정정(鼎井)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솥우물, 소두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솥우물은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세분해서 부르기도 하는데 이 때 윗마을을 윗솥우물, 아랫마을을 아랫솥우물로 부른다. 윗솥우물 북쪽 산에는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의 묘와 재실이 있다.

영가지의 기록에는 ‘정정촌은 현(縣)의 북쪽 50리에 있으며 마을 가운데 옛 우물이 있어 낙동강과 5리 떨어져 있는데, 낙동강 물이 흐리고 맑음에 따라 우물 역시 흐리고 맑았다’고 하였다.

이 우물은 원래 3개였으나 하나를 메워버려 현재 2개만 전하는데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14. 舟津里

주진리는 낙동강 가의 나루터가 되므로 배나드리, 배나들, 또는 주진(舟津)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안동군 동후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천리와 임북면의 박곡리와 예안군 읍내면의 천전동 일부를 병합하여 주진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37년 안동댐의 시설로 인하여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주진리는 현재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구 수는 70여호이다. 주진 1리에 속한 마을로는 배나들이 있으며, 주진 2리에는 삼산, 오른데, 노천 등의 마을이 있다.

◇ 배나들․주진(舟津)

고려시대 소금 장수들이 소금을 팔거나 물물교환을 위해 나룻배로 낙동강 줄기를 따라 부산에서 출발하여 안동을 지나 이곳까지 넘나들었는데 이 때 이곳의 나루터가 선착장 역할을 하던 곳이라 하여 배나들이라고 하였고 한자로는 주진이라고 불렀다. 예전에는 100여 호를 헤아리는 큰 마을이었으나 모두 수몰되고 현재 새로 조성한 마을에 진주강씨 7집과 밀양박씨(密陽朴氏) 7집을 포함하여 약 17호의 주민이 살아간다.

◇ 삼산(三山)

오른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원래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살았는데 조선 숙종 때 전주인(全州人) 류석구(柳錫龜, 1673~1737) 공이 개척하였다고 전한다. 이 마을에서 공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분이 영조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류정원(柳正源) 선생이다.

선생의 아호는 삼산(三山)인데, ‘삼산’이란 현재 삼산종택 안마루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앞산이 세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하여 부르는 것으로 류정원 선생이 이름을 떨치면서 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현재 마을 가구 수는 약 30여호로 밀양박씨가 17집이 살며, 전주류씨가 2집이며, 나머지는 각성이다.

◦ 대사간터:대사간을 역임한 류정원 선생이 살았다하여 그렇게 부른다.

◇ 오른대․오은대(五隱臺)

배나들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안동에서 정산리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주진교에서 오른편 산중턱을 바라보면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로 뒤에 오로봉이 있다. 마을 이름을 오른대, 오른데 혹은 오은대라고 하는데 오른대라고 부르는 유래는 이 마을이 노천 마을 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오룡동 밑이 된다. 수몰 전에는 15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8가구가 살고 있다.

◇ 갈대밭․노천(蘆川)

오른대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안동에서 정산리 쪽으로 가다가 주진교를 건너자말자 교각 아래로 우회전하면 현재 주진-천전간 도로확장공사가 진행중인 길이 물가를 따라 서쪽으로 나있다. 여기서 조금 들어가면 갈대밭 마을인데 이곳은 옛날 낙동강변에 갈대가 많아 갈대밭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는 노천이라 한다. 수몰 전에는 25가구의 큰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10집만 살고 있다.


15. 川前里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최초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해지며, 임하면의 내앞〔川前〕마을처럼 마을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으므로 내앞 또는 천전(川前), 천전동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예안군 읍내면 지역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천(上川), 중천(中川), 하천(下川)을 병합하여 천전리라 해서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천천리는 미질리와 더불어 예안면에서 가장 적은 가구 수가 살아가는 동네로 상천, 중천, 하천 마을에 약 10가구가 살아간다.

◇ 상천(上川)․웃내앞

마을 앞에 낙동강이 가로지르고 위쪽에 자연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상천 혹은 웃내앞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1974년 안동댐 인해 수몰지구가 되어 천전동 밑에 살던 주민들이 수몰로 인해 운남산(雲南山) 중턱으로 옮겨 살게 되었으며, 현재 3가구가 살고 있다.

◇ 중천(中川)․중내앞

마을 앞에 낙동강이 있고 마을 가운데 자연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중천 혹은 중(中)내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수몰로 인해 산 중턱에 옮겨 살게 되었다. 또, 수몰 전 동네 앞에 낙동강(洛東江)이 흐르고 동리에서 강으로 흐르는 두 하천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중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안동댐으로 인한 수몰 전에는 27, 8가구의 큰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3가구가 살고 있다.

◇ 하천(下川)․가태골

마을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강 아래에 자연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하천이라 부르며, 하래골, 가래골 등으로도 불렀다. 천전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하래골로 불리어 오다가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가태골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4가구가 살고 있다.


16. 台谷里

예안면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뒤에 태봉(胎峯)이 있으므로 이름을 탯골, 또는 태곡(台谷), 태동(台洞)이라 부른다. 예안읍지인 선성지(宣城誌) 서문에서 ‘...송(宋)나라 대중(大中), 천성(天聖) 연간인 현종대(顯宗代)에는 길주(吉州; 옛 안동)에 속했는데 신우(辛禑:고려 우왕)의 태(胎)를 현 동쪽에다 묻었다하여 다시 군으로 만들었다가 조금 뒤에 주로 승격했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한 현 동쪽이 지금의 태곡이며 그 뒷산에 태를 묻었음으로 그 산을 지금도 태봉이라고 한다.

태곡리는 예안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외촌, 곡촌, 퇴산, 남산, 덕현과 동상면 인제동 일부를 병합하여 태곡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태곡리는 덧재, 물미, 골마, 밭마, 남산, 탯골 등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 수는 약 80가구이다.

◇ 덧재․덕현(德峴)․덕재

밖말 남동쪽 덧재 아래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때 세운 정난 일등공신에 책록된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 1547~1627) 선생이 출생하고 타계한 곳이다.

선생은 어렸을 때 가세가 가난하여 마을에 있는 수양버들 앞에서 글씨 연습을 했는데 비가 오면 도랑물이 검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생은 인품이 높고 덕(德)이 많아 이 덕을 기리고자 선생이 태어난 이곳을 덕현 또는 덕재, 덧재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물미․물뫼․문미(文美)․문산(文山)․퇴산(退山)

이 마을 뒷산에 문필봉(文筆峰)이 있는데 이 봉우리를 볼 수 있는 곳에서 문필가가 난다는 전설이 있어 이 마을 이름도 이에 연유하여 물미, 물뫼, 문미, 또는 퇴산, 문산이라고 한다.

◇ 골마․소이골․소유골․금곡(金谷)․쇠골동

탯골 남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한실의 내촌(內村)이므로 골마, 골말 또는 소이골, 소유골, 금곡이라고 부르며 탯골의 하부 산기슭에 위치해 있다. 마을의 뒤에 약물탕이 있는데 큰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이 한발에 관계없이 2㎝ 정도의 구멍으로 사철 솟고 다른 물에 비하여 더욱 차고 그 물에 철분이 많다. 또, 금광(金壙)터가 있었으므로 쇠골동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담배와 고추가 주산물이고 탯골에서 시작되는 계곡을 따라 마을이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태곡리의 마을회관이 있다.

말굴렛등:골말 앞산에 있는 등성이로 고려 공민왕 때 말이 굴렀다고 한다.

◇ 밖마․밭마․외촌(外村)․탯말․한실(寒室)

태곡리의 중심지를 이루는 마을로 골말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밖마 혹은 밖말, 밭마, 외촌, 탯말, 한실 등으로 부른다. 이 마을은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 선생의 고조부인 김효우(金孝友)공이 입향하면서부터 대대로 후손들이 살게 되었으며, 마을 경내에 조성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한천정사(寒泉精舍)가 있다.

◇ 남산(南山)

태곡에서 보아 남쪽에 있다 하여 남산이라 한다. 북향 마을로 금씨(琴氏)가 대부분이다. 마을 앞으로 동계천(東溪川)이 안동댐과 합수되어 좁은 면적의 논을 이루고 있으나 만수 위험 지구로 되어 있다. 마을의 서쪽은 안동댐의 돌출부분과 맞닿아 있다.

◇ 탯골․태곡(台谷)․태동(台洞)

고려말 공민왕이 2차 홍건적란(紅巾賊亂) 때 청량산(淸凉山) 산성에서 난을 피하고 있던 중 왕자의 태보(胎褓)를 묻은 산을 태봉(胎峰)이라 하고 그 산 앞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해서 그 이 마을을 탯골 혹은 태곡, 태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 간댓골:아랫탯골과 웃탯골 가운데에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가운데 골’이 줄어 간댓골로 불리게 되었다.

◦ 주봉재:탯골의 주가 되는 산이다.


자료제보자

예안면

배용기(86세, 정산리), 최동균(정산리), 최덕균(63세, 정산리), 김석희(정산리)

권영도(기사리), 박무한(75세, 주진리), 김두성(67세, 귀단리), 신순식(동천리)

권상목(동천리), 이시한(부포리, 남봉섭(기사리), 남구용(63세, 인계리)

 

 

(출처/ 인우회 카페)

출처 : 안동시 예안면 향우회
글쓴이 : 선비정신(김기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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